국전과 함께 살다간 한국미술발전의 주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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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해방 후 국전과 미협 활동의 주역을 맡았던 서양화가 도천 도상봉씨는 말년을 제작생활로 즐겁게 보냈다. 그는 69년 이후 병상(고혈압)에 눕게 된 76년 초까지 작품제작에 열중했고 해마다 발표전을 가져 화가로서의 마무리를 화려하게 했다.
그러나 그가 많은 상을 받은 것은 우리 나라 미술발전에의 기여 때문이다. 60년 3·1문화상을 비롯하여 예술원상(64년)·대통령표창(68년)·국민훈장 모란장과 문화예술상(70년) 등이 모두 국전과 미협을 통하여 활동한 공헌에 주어진 것이다.
1902년 함남 태생인 그는 보성 학교를 나와 명치대 법학부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미술로 전향, 27년 동경미술학교를 나왔다.
그는 배일사상이 강해 일제 때엔 거의 대외활동을 피했고 경신·보성·배화 등 교직에 묻혀 지냈다.
그러다가 해방 후 국전창설의 산파역을 맡아 49년부터 69년까지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55년 한국미협의 이사장을 지냈다. 60년이래 예술원 종신회원이었다.
그의 초기작품에는 인물이 적지 않으나 말년에는 풍경과 특히 정물을 많이 남겼다. 고미술 애호가였던 까닭에 정물화에는 그의 무르익은 안목이 온화하게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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