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프랑코」체제를 반대한 공화파 인간과 대화하려 시를 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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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스페인」문학에 「노벨」상이란 영광을 안겨준 「비센테·알레이샨드레」는 그의 자유민주주의적 경향으로 「프랑코」총통에 의해 오랫동안 유형 당한 시인이었다. 그는 최근 신장과 심장병으로 고통받다가 다시 눈 수술까지 받는 등 건강악화로 가까운 친지들과도 잘 만나지 않고 있다.
그의 문학은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는 「스페인」내전에서 「프랑코」에 의해 패배한 공화파인데 「스페인」의 민주화과정에 있어 그의 「노벨」상 수상은 의미심장한 바 있다.
그는 「엘·파이스」지와 가진 단독회견(불 「르·몽드」지가 14일 전재)에서 『나는 공화파를 분명히 지지했고 전쟁시도 많이 썼다. 하지만 나는 내전 이후 망명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조국을 등진 「피카소」 등과는 달리 그는 무엇보다도 「스페인」국민의 운명과 함께 살고싶었던 것이다.
『공화파가 패배한 후 나는 수많은 젊은 세대, 특히 청년시인들과 지하에 숨어살다시피 했다.
청년들은 나의 시가 판매금지 되었을 때 나를 지원해 주었고 오늘날 조국의 잿더미 속에서 나의 시가 재생하는 「찬스」를 갖게 해 주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시를 너무나 늦게 발견했다고 말했다. 시에 눈을 뜨게 한 스승들은 「안토니오·마샤도」와 「환·라몬·지메네스」와 「프랑스」와 「폴·발레리」 「랭보」 「보들레르」 등 상징파 시인들이었다고 했지만 『나는 이들 선구자들을 공격하기보다는 이들의 작품에서 최선의 것을 끄집어내어 전진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난해성으로 유명한 제2시집 『대지의 정열』에 대해서 그는 『생활의 뿌리를 발견하려고 무한히 애썼으며 인간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예술적으로 표현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나의 언어가 그 시대엔 다소 어려웠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문화가 우리를 시인으로 하여금 대중이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쓰게 했기 때문이다』고 해명. 『시는 만인에게 힘이 되어야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그것은 이미 시가 아니다』고 단언한 그는 『사회는 예술과 문학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두들 「알레이샨드레」는 죽었다고 단언했었다. 나는 조그만 짐 속에 밀폐되어 살아있는 「심벌」일 뿐이었다. 나의 모든 저서가 금지되었고 내 이름은 삭제되었다. 나는 침묵으로 처단된 사나이이며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시작을 계속하여 「낙원의 그림자」를 완성했다. 1944년에야 나는 한 출판사로부터 내 이름이 삭제되지 않았다는 통보를 받았던 것이다….』고 시인으로서의 불행했던 때를 회상했다. 그가 비참한 「침묵시대」의 시로써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마지막으로 민주화의 길을 걷고있는 오늘의 「스페인」을 보는 그의 시각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정치적 변동기에 있어서 절망적인 질서의 옹호자들은 새로운 체제의 창조자로 둔갑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들은 너무나도 잘 변절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독재자 밑에서 살아왔다. 언제든지 체제야 어떻든 간에 번영을 바라는 인간들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번영을 위해 일한다. 그것은 야망인 것이다. 지난 40년을 특전 속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들만의 번영을 간직하려고 한다. 그러나 40년 후 우리는 우리가 만인을 위해 일한 것을 알고 있다. 문학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작품이라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파리=주섭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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