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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정·관·민 삼각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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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오영환
오영환 기자 중앙일보 지역전문기자
오영환
논설위원

국가는 정(政)·관(官)·민(民)이 어우러져 만들어간다. 흥망성쇠하는 유기체다. 국가의 경쟁력과 품격, 개인의 행복과 안전은 상당 부분 그 삼각 관계에 답이 있다. 이상적 국가상은 정·관·민을 꼭짓점으로 하는 삼각형이 협력과 긴장 관계로 정립(鼎立)하는 것일지 모른다. 하나나 두 개의 꼭짓점이 독주하고 다른 쪽이 끌려다닐 때 수직 사회가 된다. 위에서 아래로의 관 주도 시스템이 되기 마련이다. 세 꼭짓점이 유착될 때 부정과 부패가 싹튼다. 일그러진 삼각형은 개도국의 전형이다. 성장 지상주의는 그 적폐를 은폐하는 가림막이었다.

 한국은 발전 도상의 틀을 벗어난 듯싶었다. 민간의 역동성과 활력은 눈부시다. 시민의 정치 참여 장벽이 없어졌다.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지구촌을 누비고 있다. 입법·행정·사법의 3권 분립은 확고하다. 세월호 참사는 그 이면에 잠복해 있던 한국의 자화상을 들춰냈다. 비대하지만 무능한 관. 관료집단 견제는커녕 한통속이 된 정. 납세자·유권자의 관점에서 세금·권력 감시에 눈을 부릅뜨지 못한 민. 그리고 하나같이 공공(公共)이 뒷전이었던 정·관·민. 세월호 참사는 한국 시스템의 파산이다.

 관료 집단부터 들여다보자. 관료는 고도 성장의 견인차였다. 그만한 테크노크라트가 없었다. 공복(公僕)으로서의 자부심도 강했다. 산업화 초기, 민이 상대적으로 앞선 관에 의존하면서 관료 천하가 됐다. 규제만큼이나 관료 집단의 몸집과 권력도 커졌다. 그새 세상도 바뀌었다. 민간 영역은 급성장했다. 글로벌화·정보화로 공공 서비스 수요는 훨씬 다양해졌다. 거대 권력은 새 조류를 따라잡지 못하고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경직되고 위기에 취약한 조직이 돼버렸다.

세월호 침몰 당시 관료 집단은 허둥대면서 목도만 했을 뿐이다. 에어포켓은 관료가 만든 신화가 아니었던가. 부처별 칸막이 행정, 현장 경시, 책임 회피형 문화가 빚은 실패였다. 책임 소재가 미궁일 수밖에 없다. 이심전심식 불문율을 단죄하기가 쉽겠나.

 관료 집단의 정체성 마비도 갈 데까지 갔다. 관료들이 재직 부처 산하 공공기관·협회와 규제 대상 민간기업으로 취업하면서 공(公)과 사(私)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퇴직 관료를 고리로 관과 민이 동거하는 구조다. 규제·감시하는 쪽이 받는 쪽의 포로가 되기 십상이다. 해양수산부가 선박 안전관리·검사를 하는 해운조합과 한국선급을 제대로 감독했다면 세월호는 진수도, 출항도 못했을 것이다. 두 기관에는 해수부 출신들이 수두룩하다.

국민연금보다 혜택이 큰 공무원연금의 적자를 세금으로 메워주는 판에 관료의 재취업이 공익에도 맞지 않는다면 그 루트를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 그게 시대의 형평에도 맞다. 공무원은 하나의 특별한 직업일 뿐 신분이 아니다.

 관료개혁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관료 집단의 자기보존 저항 때문만이 아니다. 정(政)의 책임도 무겁다. 관료 집단의 권력을 견제하고 전문성을 살리는 개혁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사안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도 대선과 국정 선거의 핵심 이슈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정은 관에 휘둘리기 일쑤다. 규제를 양산하고 낙하산 인사를 돕는 법 제정을 통해 관료의 영역을 넓혀주었다. 정치의 빈곤은 또 다른 적폐다. 국민의 관료 불신에는 정치 불신도 깔려 있다.

 민간의 타성도 문제다. 관은 위이고, 곧 공(公)이라는 통념을 깨야 한다. 관의 인사를 문제 해결의 시작과 끝으로 보는 사고방식이야말로 관치 의존증이다. 결국은 주주(株主) 정신이다. 국가를 움직이는 동력은 국민이 내는 세금이다. 그것이 정과 관의 어떤 입법과 의사결정을 거쳐, 어떤 방식으로, 어디에 쓰여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민이 따지는 제도를 만들 때 정·관의 폭주와 유착은 제어된다. 정·관·민의 새 거버넌스도 구축된다. 민의 각성·자립·참가 없이 새로운 지평은 열리지 않는다. 국정과 세금의 파수꾼 역할을 하는 비영리 민간단체는 다다익선이다. 국가개조는 민으로부터, 제도와 함께 시작될 때 본궤도에 오른다. 우리에겐 새로운 나라의 틀을 만들 저력이 있다.

오영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