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권의 대한 현실주의 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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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소-중공의 입장은 현실주의와 교조주의라는 두개의 모순된 규율 사이에서 유동하고 있는 것 같다.
소련과 북괴 또는 중공과 북괴는 같은 공산주의 진영에 속한다는 점에서 피차간「이데올로기」적·국제주의 적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다. 때문에 북괴가 어떤 주장을 내세운다 해도 소-중공은 그에 동조해 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것이 바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소-중공 태도의 교조주의적인 측면이다.
반면 소련·북괴 및 중공·북괴 사이에는 그 나름대로의 어쩔 수 없는 견해차와 이해 대립이 공존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견해차는 한반도 문제를 대하는 각자의 입장에 있어서도 예외일 수가 없을 것이며, 소-중공이 북괴의 대남·대미전술이나 행동 양식을『너무 비현실적』이라고 간주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자고 하면서, 인구 3천5백만의 반공국민을 완벽하게 통치하고 있는 한국을 외면한 채 미국하고만 상대하겠다고 하는 북괴의 억지는 소·중공의 적잖은 회의를 자아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한반도 정세 판단이 잠재하고 있는 현실주의적 요소다.
지금까지 소-중공은 여러 가지 필요와 제약 때문에 그러한 현실주의적 잠재요소를 신중히 억제하면서 북괴 제안 지지라는 교조주의적 반응으로만 일관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 점이 우리의 6·23선언 실천노력이 당면한 타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지난 7일 중공의 등소평은 중공을 방문한 일본 자위대 전직 간부들에게『남-북한의 직접 대화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거의 때를 갈이해서 소련 당국은 한국의 고위 외교관에게 정부수립 후 처음으로 정식 입국「비자」를 발급한 사실이 밝혀졌다. 한편 같은 날 우연의 일치인지, 「인도네시아」주재 동독 대사관도 그곳 한국대사를 처음으로「리셉션」에 초청, 이대사가 참석했다는 소식이다. 이처럼 중공이 북괴의 입장과는 달리 한국과의 직접 대화 필요를 공언하고, 소련·동구가 한국 외교관을 정식으로 응대했다는「사건」은 그들의 종래의 행동「패턴」에 비해 볼 때 상당히 유화적이며, 현실주의 적인 「제스처」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의 문제는 이 현실주의적 요소의 싹을 어떻게 하면 지속적으로 증폭시켜 나갈 수 있겠느냐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소련과 중공이 북괴의 모든 입장을 전적으로 거슬리는 사태가 올 수 있으리라고는 물론 기대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중공이 조금이라도 국제사회의 정상적인 문제해결 방식에 응할 용의가 있다면, 현존하는 국가적 실체나 현존 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분쟁 사안도 해결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만은 허심탄회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3천5백만의 국민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엄연한 국가적 실체다.
이 실체의 주권에 대한 정당한 국제법적 대우와 존중이야말로 한반도문제 해결에 가장 선결적인 요건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소-중공의 현실주의적 태도 수정을 촉구하면서 대 공산권 외교접촉과 관련한 정부의 면밀한 전략수립 필요를 강조해 두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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