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계적인 한자교육이 아쉽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자는 수천 년 전에 인류가 글자를 가지기 시작했을 때의 그 원시성을 지니고 있는 글자이며 쓰기 힘들고 배우기 어렵기로 세계에서 으뜸가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글은 가장 현대적인 글자로서, 배우기 쉽고 쓰기에 간편하기로 세계에서 또한 으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원시와 현대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다. 이 이질적인 두 가지 글자를 섞어 써서 「우리는 학교에 간다」와 같이 표기하기도 하고 「학교」를 때로는 「학교」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것은 이중적인 글자생활이다.
이 의미 없는 후진성을 탈피하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한글만으로 글자생활을 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한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못 읽겠으니 한자를 꼭 붙들어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신문 같은 데서는 그 주장을 어느 정도 따르고 있음을 발판으로 하여, 이런 현실 때문에 한자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한다. 문교정책도 이에 따라 갈팡질팡 이다.
한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현상은 일제교육의 더러운 선물이다. 일제교육의 우등생들은 일본말이나 배웠지, 언제 한글신문 한 장이나 읽었던가? 그러니 한글이 눈에 들어가지 않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금 자라는 젊은 세대를 보라. 그들은 정반대로 한자가 섞이면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지 않는가? 일제교육의 그 더러운 선물을 눈에 간직한 채 그것을 현실이라 우기면서 한자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니 이야말로 『시대역행』적인 처사이다.
우리는 한글전용이란 이상을 위해 현실을 잊어버려서도 안될 일이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집착하여 이상을 포기하거나 이상으로 향하는 발길을 늦추어서는 더구나 안될 일이다. 하물며 그들이 주장하는 「현실」이란 절대성을 띤 것도 아님을 생각할 때는 더더구나 그러하다.
우리는 지금 원시와 현대의 모순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이 고민은 꼭 겪어야 할 일이 아닌데도 우리들이 스스로 부른 고민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고민도 현실인 바에야 우리들은 이것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야 한다. 모순은 항상 양면성을 띤다. 그러므로 모순의 극복도 양면적이어야 한다.
첫째, 한자는 없애야 하고 그리고 없앨 수 있다는 우리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글자생활은 한글만으로 해야 한다. 현대생활은 속도의 시대이다. 글자생활도 극도로 빨라지고 있다. 이에 적응하기 위해서도 한자는 없애야 한다. 따라서 글자생활의 표본인 각종 교과서의 현대문의 표기는 한글만으로 되어야 한다. 이것은 모두 가능한 일이다.
둘째 현실과 타협하는 길은 「한문」교육을 체계적으로 하는 일이다. 한문은 국어가 아니다. 따라서 한문은 국어와는 따로 가르치면 된다. 한자교육은 한문시간에서만 해야 한다.
현실의 필요성 때문에 부득이 한자를 가르친다 하더라도 잠정적이나마 혼용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문교육은 국어생활과 엄밀히 구분해야 되고 그래서 점차 줄여나가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교육은 지금 실시되고 있는 것으로 족하다.
시대역행하는 일의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오래 왈가왈부하는 것은 불필요한 낭비다.
다만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교육을 좀 더 체계화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한자를 가르친다는 점만을 서둔 나머지 교과서의 내용과 학습안 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지 못했다. 더구나 대개가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실정이어서 선생 없는 교육이 되고 말았다. 교육에는 교사양성이 뒤따라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필자=서울대교수·국어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