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용한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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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상용한자문제와 관련, 『현실적으로 상용되고 있는 한자를 없애자는 주장도 옳지 않지만, 상용한자를 더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옳지 않다』고 한 박 대통령의 지적은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한자사용과 그 한계문제에 대한 하나의 명확한 지침이 될 것이다.
대통령의 지적을 기다릴 것도 없이, 역사적 안목에서건 현실적 안목에서건 상용한자 수를 현재보다도 더 늘려야한다는 주장에는 물론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사실상 그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펴는 이가 별로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일상생활에 관한 한 도리어 한글만을 전용하는 개인과 공공기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나고 있으며, 또 이 같은 추세는 한글타자기와 한글「컴퓨터」의 보급에 따라 장차 더욱 촉진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서 명확히 분간해야 할 것은 일상생활에서의 「한글전용」 또는 「한자사용」의 문제와 「한자교육」의 문제를 혼동해서는 안되겠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현실은 불행히도 일부 극렬 한글전용논자들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이 금기의 혼동을 조장하는 언동을 자행함으로써 한때나마 이 나라의 모든 학교교과서에서 한자를 몰아내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겪고 있는 언어생활에 있어서의 커다란 혼란과 자라나는 세대의 지적편의문제란 실상 이들 이성을 잃은 극단논자들이 저지른 망동의 후유증이라 하겠으며, 이점 이번 대통령의 지적은 특히 이들의 경거망동에 대한 정문의 일침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교육의 근본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재 및 장래에 걸쳐서 자라나는 세대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는 공동사회 안에서의 조화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언어능력과 태도를 함양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한자문화권 속에 살며 주위환경이 모두 한자어의 바다라 해도 과언이 아닌 사회 안에 사는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 그 모체인 한자에 대한 대면조차 못하게 하는 교육이 어찌 정상적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국민을 의식적으로 눈 뜬 장님으로 만들고, 국민에게 문화적 단절을 강요하는 폭거라 해서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한자의 사용과 그 교육의 문제는 혼동해선 안될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뜻에서 2천자 안팎의 상용한자를 가르치는 문제와 그것을 일상적으로 쓰고 안 쓰고 하는 문제는 별개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이지만, 국민학교 과정에서부터 일정한 범위의 한자를 반드시 필수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에는 조금도 후퇴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도 국민학교 과정에서부터 이 정도의 상용한자를 가르치는데는 별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닐 뿐더러, 그러한 한자교육이 어린이들의 사고능력 계발과 전반적 학업성취도의 향상을 위해서도 큰 효과를 거두는 것임은 이론상으로나 실제경험상 의심할 여지가 없는 터이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일취월장하는 과학기술시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그 과학기술의 개척과 발전에 앞장서기 위해서도 한자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확하고 치밀한 개념의 파악과 그 구사능력이야말로 과학적 사고의 근간이라 할 수 있을진대 정확한 한자어의 구사능력을 함양하는 일은 곧 과학적 사고의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국민학교 과정의 교과서에서부터 1천8백50자(1,900자로 늘릴 예정)의 상용한자를 가르치고 있는 일본에서 최근 이 상용한자의 수효 및 종류에 확대조치가 취해지고, 표준자체의 새로운 개편까지 단행된 것도 이 같은 고려와 무관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뿐더러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한글만 전용해오던 북한지역에서 조차 최근에는 그 교과서에 한자병기의 움직임이 나타났다는 일부 일본학자들의 보고는 이런 뜻에서 주목할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국민학교 과정에서부터의 상용한자교육의 부활을 거듭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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