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프레슬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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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가난하고, 대학도 못 나오고, 연줄도 없는 젊은이가 출세하고 돈을 벌려면 운동선수가 되거나 연예인이 되어라. 미국에서의「석세스·스토리」의 비결이다.
「미시시피」의 촌구석에서 고교밖에 못 나오고 어깨에 「기타」하나를 메고 「뉴욕」에 나온 빈털터리의 「엘비스·프레슬리」.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미국에서도 드문 입지부중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저 긁을 정도의 「기타」솜씨, 음감적으로도 별로 대단찮은 귀, 멋없는 노래』이렇게 그를 키운 「셈·필립」이 평했던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신화적 인물이 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미시시피」의 흑인들은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밤을 새며 흥분과 피로로 지쳐 쓰러질 때까지 노래하고 춤을 췄다.
비참한 환경과 슬픔을 잊게 만드는 황홀의 한 순간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런 흑인들의「리듬」과「블루스」의 음악은 기도와도 같은 것이었다.
「프레슬리」의「로크」음악도 이런 흑인음악의 흐름을 타고 있던 것이다. 그가 몸 전체를 흔들며 노래한 것도 당연했다. 그가 온몸으로 빚어내는 음악이 10대의 소녀들에게 준 효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즐겨 사랑만을 노래했다. 가사도 지극히 단순하고 반복이 많은 것이었다. 그것은 혼란에 찼던 50년대의 미국사회에 대한 역겨움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그는 몇 해 안 가서 7억원 짜리 「점보·제트」자가용비행기를 갖는 억만장자가 되었다.
「골든·레코드」도 30종류나 나가고 4억의 인구가 한 장씩 가질 만큼 많은 수효의 「레코드」가 팔렸다. 「하와이」에서는 아예 1월14일을 『「프레슬리」의 날』로 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인기란 얻기보다는 유지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영광의 자리도 마찬가지다.
「프레슬리」는 40이 넘어서까지 20대의 젊은이처럼 격렬하게 몸을 흔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발라드」가수로 전향하여 여기서도 성공했다. 돈도 여전히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난 몇 해 동안 그는 몹시 괴로워했던 것 같다. 그것은 무대에 설 기회가 줄어든 때문도, 이상비대증 때문만도 아닌 모양이다.
엊그제 죽은 그의 사인은 심장마비였다고 병원 측은 발표했지만 경찰에서는 마약기운의 탓이 아닌가 보고있다.
결국 영광의 화려함 속에 자리잡은 허망함과 외로움이 그를 가장 괴롭혔던 게 아닌가 여겨진다.
「프레슬리」의 죽음은 미국의 「석세스·스토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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