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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남도의 어느 고을에서 요즘 이상한 기이 풍습이 벌어져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나체로 질주하는가 하면 무덤을 파헤치려다 저지되기도 했다. 비를 기다리는 애타는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을 것 같다.
기우제의 풍습은 이미 기원전 춘추시대에 중국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 나라는 예부터 기우제를 종묘·사직·문묘대제에 준하는 엄숙한 의식으로 지냈다.
지방에서 지내는 기우제는 산신을 대상으로 삼는다. 덕망과 학식을 겸비한 민간제관이 목욕 재계 하고 산신에게 절을 한다. 이 제사는 저녁이나 새벽에 올려졌으며 참석자들은 흰옷을 입어야 했다. 한밤에 지내는 기우제에선 사람들의 허물을 벗어버리는 뜻으로 옷을 입지 않았다고도 한다.
천기의 변화를 인간의 허물과 비유하는 옛사람들의 사고는 사뭇 「휴메인」(인간적)한데가 있다. 인심이 어둡고 세정이 메마르면 하늘도 비를 내리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 같다.
조정의 기우제는 때에 따라 무려 12차례나 거듭 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는 나무로 호두를 깎아 한강에 던진 일도 있다. 강속에서 용과 호랑이가 그야말로 용호상박을 벌이게 하려는 것이다. 이들이 으르렁대면 하늘에 구름이 일어 비가 내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동화 같은 이야기다.
기록을 보면 우리 나라에서 가뭄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곳은 동해안의 포항지방이다. 10년에 2·4회가 가물었다. 그 다음이 서해안의 목포지방으로 10년에 1·9회, 3위는 광주지방으로 10년에 적어도 한번씩은 가뭄이 들었다.
가뭄으로 물 부족현장이 가장 심했던 연도는 1939년. 추풍령은 무려272.5㎜의 부족을 기록했다. 2위는 1951년 포항으로 254.8㎜의 비가 덜 내렸다. 역시 1939년 대구도 몹시 목이 탔다. 246.8㎜의 비가 부족했다. 1965년의 강릉(243.9㎜), l967년의 광주(225.0㎜) 도 기록적이다.
1939년의 가뭄은 서울·인천·추풍령·대구 등 중부와 남부의 내륙지방을 뒤덮어 가장 넓고 가장 심했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가뭄의 원인은 물론 고기압의 영향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그후 기압이 왜 그처럼 오래도록 비구름을 막고 있는가는 기상학자들의 수수께끼가 되고 있다. 일설에는 태양흑점의 수가 적어질 때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주장도 있다. 태양흑점 수가 왜 적어지는가는 역시 의문이다.
옛 속담에 모사재인·성사재천이란 말이 있다. 우리는 묵묵히 최선을 다할 뿐이다. 하늘도 무슨 응답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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