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노 시인의 작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시인 이산 김광섭 옹이 작고됐다. 그는 10여년 전 야구구경을 하다가 쓰러졌었다. 뇌출혈 때문이다.
『저녁 등불 아래 혼자 앉아서 어느 마지막 잔 같은 차를 마신다.』
병상에서의 이산은 나날이 절망이었던 것 같다. 그는 운신이 불편해 꼬박 누워있어야 했다. 『황혼이 울고 있다』는 병상의 시는 눈물겨웠다.
그는 언젠가 투병기에서 『아! 80이 넘은 고령의 어머님의 따사로운 손길·빳빳한 손발을 자꾸 주물러 주시며 위로하시던 그 손길』하고 읊은 일도 있었다.
그의 정신력은 무서울이만큼 놀라왔다.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며 그는 잠시도 생의 비상에서 눈을 돌린 일이 없었다. 5년인가의 투병 끝에 그는 일어났다.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새벽녘이면 산들이/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종일토록 먹지도 않고 앉았다가는/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평야만 남겨 놓고 먼 산으로 간다.』
『산』과 같은 그의 시는 그의 병상을 지켜준 의지의 힘이었던 것도 같다.
그는 병고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작품을, 그 어느 작품들보다도 좋은 작품을 발표했었다.
이산은 병고를 딛고 일어나서 스스로 『관조의 세계』를 갖게 되었노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삶에 대한 애틋한 애착의 경지는 훨훨 넘을 수 있는 심경을 말한 것이다.
그는 때때로 『과용 인생』이라는 말을 했었다. 중세「유럽」의 철학자 성「안셀름」이 한 말-.
「호모·비아토르」(Homo Viator)를 그는 터득했던 것 같다.
그의 생애를 돌아보면 「호모·비아토르」로는 너무도 보람스러운 일들을 했었다. 항일운동으로 4년의 옥고를 치른 일도 있었으며 건국초기에는 이승만 박사를 보좌한 일도 있었다. 그후로는 줄곧 교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서 있었다. 기슭에는 채송화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그의 근작들은 모두가 생의 감각으로 이어지는 내용들이다. 모든 시가 그렇긴 하지만, 그는 탈한 듯한 경지에 접어들어 시를 쓰고 있었다.
그는 후진의 문인들에게도 이런 의미에서 좋은 교훈이 되었다.
고통과 삶의 정수가 축적되지 않은 작품은 생명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 준 것이다.
그의 부음이 주는 적막감도 바로 이런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