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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강성현] 공자는 성인인가, 기회주의자인가

중앙일보

입력

어느 날 아침, 텅 빈 숙소에 홀로 앉아 무심코 TV를 켜니, 두메산골 허름한 교실에서 코흘리개 아이들이 목청을 높여 논어의 구절을 낭독하는 모습이 비친다.

“즈즈웨이즈즈, 부즈웨이부즈, 스즈이에(知之?知之, 不知?不知, 是知(智)也. zh? zh? wei zh? zh?, bu zh? wei bu zh?, shi zhi y?). ”

과연 공자의 후예답다.《논어·위정<爲政>》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가르치는 자들이 본받아야 할 바른 자세다. 굳이 노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앎의 세계’를 궁구하는 것은 위태로울 뿐이다. 지식인이 겸손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갓집 개(?家之狗)!’

의지할 곳 없이 떠도는 ‘개 신세’를 말한다. 14년 동안 열국을 떠돌던 공자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어느 누가 이런 ‘불멸’의 별명을 붙여 주었을까?

정(鄭)나라 사람이 자공에게 말하였다. "동문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이마는 요(堯)임금을 닮았고, 목은 고요(皐陶)와 흡사하며, 어깨는 자산(子産)과 비슷하다. 그러나 허리 아래는 우(禹)임금에 세 치 못 미친다. 몹시 지친 것이 마치 상갓집 개와 같다." 자공(子貢)이 이 사실을 공자에게 아뢰자, 공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외양은 꼭 그렇지 않지만 '상갓집 개' 같다고 말한 것은 그렇다! 정말 그렇다!” -《사기·공자세가(史?·孔子世家)》-

일이 제대로 안 풀리고 가끔 소외를 느낄 때, ‘상갓집 개’, 공자를 떠올리면 늘 위로가 되었다. 어릴 적 듣고 배운 공자는 인류의 스승이요, ‘성인’ 그 자체였다. 세월이 흐르자 공자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그도 이 나라 저 나라를 기웃거리며, 벼슬을 갈망한 ‘속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친근감마저 느꼈다.

유교는 황제체제를 유지하는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위정자들은 필요에 따라 공자를 받들기도 하고, 방해가 되면 용도 폐기하였다. 한 무제는 공자를 활용하였고 마오쩌둥은 내쳤다. 공자를 대표로 하는 유가는 원래 제자백가의 한 유파였다. 그러다가 한 무제에 이르러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로 받들었다.

5.4 운동 당시 차이위안페이(蔡元培, 1868~1940), 루쉰을 비롯한 지식인은 신격화한 공자와 봉건 통치 질서로서의 유교이념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차이위안페이는 교육부장관 시절, 교육개혁령을 반포하여 초등 교과 과정에서 경전 강독을 없앴다. 아울러, 각 급 학교에서 시행되던 ‘공자 제례의식’을 폐지하였다.

루쉰은 <타도공자점(打倒孔家店)>에서 ‘공맹(孔孟)의 도’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도(吃人之道)라며 맹공을 가하였다. 아울러 맹목적인 충과 효를 강조하는 낡은 교육, 경전을 암송하는 ‘노예교육’에서 속히 벗어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공자는 타도해야 할 구시대, 구질서의 상징이었다.

공자는 마오쩌둥에 의해 또 한 번 수난을 겪었다. 마오쩌둥의 암살을 기도했던 임표는 평소 ‘극기복례(克己復禮)’, ‘살신성인(殺身成仁)’ 등 논어의 구절에 심취했던 것 같다. 이로 인해 ‘애꿎은’ 공자에게 까지 불똥이 튀었다. 역대 반동 지배계급은 모두 공자를 받드는 ‘존공파(尊孔派)’였다며, 공자를 부정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른바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이다. 이 때 공자의 유적과 공자를 모신 사당 등이 대대적으로 훼손됐다. ‘상갓집 개’, 공자의 슬픈 운명을 대변한다.

오늘날 중국은 죽은 공자를 다시 살려내 중화 민족주의를 한껏 부추기고 있다. 전 세계에 날로 확산되는 ‘공자 학원’이 바로 그 생생한 예다. 베이징 사범대학 교수 위단(于丹, 51)은 중앙방송이 후원하는 ‘백가강단(百家講壇)’에서《논어》를 강의하여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논어》 대중화에 기여하였고 공자 숭배에 단단히 한 몫을 하였다. 위단이 쓴 《논어심득(論語心得)》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반면에 공자를 ‘교활한 기회주의자’로 몰아 독설을 퍼부은 인물이 있다. 바로 인권운동가요,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널리 알려진 류샤오보(??波, 61)다. 2011년 국내에 번역 소개된《류샤오보, 중국을 말하다》에 29편의 글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 <상갓집 개, 문지기 개가 되다>에서 공자의 대한 일부 지식인의 평가를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먼저 ‘공자 홍보대사’로 발 벗고 나선 위단에 대해 공격의 화살을 날렸다.

“위단은 대중에게 영합하는 천박한 강의를 하는 것도 모자라, 공자를 자기 마음대로 분석하고는 ‘유교 부흥’을 선도하고 있다. 위단은, ‘어떠한 일을 겪든 원망하지 않고 참고 견디면 삶이 편안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논어》의 핵심’이라고 하였다.”

영어(囹圄)의 몸인 그로서는, 중국 정부의 후원 아래 돈방석에 앉아 공자를 찬양하는 위단이 가증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아울러 류샤오보는 베이징 대학 리링(李零, 68) 교수의 글, 《상갓집 개 : 나는 논어를 읽는다(?家狗 : 我讀 ‘論語’)》에 깊은 공감을 표한다. 리링 교수의 글을 일부 옮겨보자.

“ …공자는 돈키호테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게 가장 적합할 것이다. …역대 제왕이 찬양한 공자는 진짜 공자가 아니다. 진정한 공자는 성인도 아니며 왕도를 추구한 인물도 아니었다. …공자는 고전을 사랑하고 배움을 즐기며 교육에 열성적이었다. 공자는 때로는 무력했으며 초조하고 불안해하기도 했다. 방랑하는 개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공자가 진짜 공자의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류샤오보 자신의 공자에 대한 ‘독설’을 한 번 들어보자.

“공자가 열국을 주유한 것은 권력자에게 등용될 수 있는 안식처를 찾기 위해서였다. 공자는 ‘제왕의 스승’이 되고 싶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고 권력에 등용되지 못한 ‘상갓집 개 ’가 되고 말았다. 만일 공자가 당시 그를 등용해 줄 제왕을 만났다면 공자 역시 권력의 ‘문지기 개’로 전락했을 지도 모른다.”

그의 독설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공자는 정치가들을 찾아다니다가 실패하자 결국 도덕의 교주가 됐다. 그가 스승 되길 좋아하고, 스승을 자처했던 것은 거만하고 천박한 인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자는 태평할 때 세상에 나오고 난세에 숨는 처세의 대가였고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가장 교활하고 가장 실리적이며, 가장 세속적이고 가장 무책임한 정신의 소유자인 공자가, 수천 년을 이어 온 중화민족의 성인이자 모범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류샤오보는 공자를 ‘기회주의자’의 전형으로 폄하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공자 신봉자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가 독설을 퍼붓는 데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공자가 많은 나라를 떠돌며 벼슬에 ‘집착’하는 모습이 여러 차례 드러난다. 심지어는 반란을 일으켜 득세한 공산불뉴(公山不?), 필힐(佛?)이 초빙해도 기꺼이 달려가려고 하였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러 은자들이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조롱하거나 애석하게 여겼다. 초나라의 광인 접여(接輿)는 벼슬길이 위태하다며 극구 만류하였다. 이런 몇 가지 이유만으로 공자를 ‘교활한 기회주의자’로 몰아붙여서는 공자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

한편, 한국에도 오래 전부터 공자 논쟁이 있어 왔으며, 늘 재연될 소지를 안고 있다. 김경일은《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서 유교의 폐해를 신랄하게 지적하며, 유교의 종언을 고하였다.

“이방인의 문화는 조선 왕실의 통치이데올로기가 되어 우리의 삶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신분사회, 토론부재를 낳은 가부장의식, 위선을 부추기는 군자의 논리, 스승의 권위강조로 인한 창의성 말살 교육 따위의 문제점들을 오늘날까지 지속시키고 있다. …유교의 유효기간은 이제 끝난 것이다.”

최병철은《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에서 위 책을 ‘준엄하게’ 성토하였다.

“최근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읽으니 막가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 …빗나간 화살로는 공자를 죽일 수 없다.”

그는 유교의 유효기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유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강변한다. 그 이유로서 공자의 향학열, 절망을 모르는 정신, 사랑의 실천자, 뉘우칠 줄 아는 인물 등 네 가지를 들어 공자를 두둔하였다. 논리가 다소 박약하다.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공자님’은 죽어서도 바람 잘 날이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식인이 ‘밥’, 벼슬, 명예를 초탈하여 꿈을 펼치기란 쉽지 않다. 공자는 성인도, ‘교활한’ 기회주의자도 아니다. 공자 자신도 인정했듯이, 때를 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방황하는 ‘상갓집 개’라는 표현이 가장 사실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이제 공자를 벼슬과 학문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려했던 ‘고뇌하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아야 할 것이다.

전 웨이난(渭南)사범대학 교수 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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