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 장기영 형의 명복을 빌면서|이병철<중앙일보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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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관계회사의 지방시설들을 돌아보는 차 중에서 백상 장기영 형의 부음을 들었다. 생멸은 자연의 이치라고 하지만 이토록 허허한 슬픔이 졸지에 올 줄은 몰랐다.
백상 장기영 형과는 최근 몇해째 매주 두 번 씩은 줄곧「골프」를 함께 해 왔다. 영서하던 바로 전날인 일요일에도『몸이 약간 불편하다』면서 후반「코스」에야 참가하였지만, 저녁 좌중을 예의 호기 찬 담소로 즐겁게 하여 주었다.
헤어 질 때『며칠간 일본에 다녀 올 일이 생겨 수요일에는 못 나오겠고, 다음 일요일에는 꼭 만나자』고 말하더니 그것이 백상과의 현생의 작별이 되고 말았다.
백상과 나와의 교분은 백상이 한은에 있을 무렵부터이다.
해방 후 한은 법을 다듬는 일에 참여했던 백상은 중앙은행의 조사기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였고 해방 후 처음으로 경제연감을 펴내는 등, 중앙은행으로서의 한은의 기틀을 잡았다.
「한국일보」의 창간과 연이은 자매지지의 발간은 하나처럼 알차서, 구석마다에 장기영 사장의 정성과 지혜가 빛났다.
언론인으로서의 백상은 박력과 예지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사람을 아끼고 키우는데 타고난 대기의 금도를 여실히 나타냈다.
백상의 깊고 넓은 인정과 의리 속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그들의 능력을 쌓아 올렸다. 무뚝뚝한 거구의 대장부 백상은 깊은 심저에 언제나 신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서의 백상은 문자 그대로 천수천안의 자재력을 발휘했다. 경제부처의 상하좌우를 탄력성 있게 통괄했고, 과감하게 외자도입을 본격화했으며, 역 금리 체계라는 착상으로 고리저축과 저리융자라는, 양면의 수요를 충족시켰다.
침식을 잊은 채 전력투구한 백상은 상하의 이료도 그만큼 혹사했지만 별 불만을 사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헌신과 일 위주라는 백상의 자세에도 그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늘진 곳과 불우한 사람을 보살피는 백상의 인자에 모두가 끌렸던 탓이라고들 한다.
그 뒤 남북조절 위 대표로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멀리 내다보는 인내와 설득에 지성을 다해 왔고, 국회의원과 체육인으로서는 화동을 바탕으로 한 심혈을 기울여 왔다.
이렇듯 백상의 마음과 몸과 두뇌는 수유도 쉴 새가 없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고, 일에 온갖 힘을 쏟았으며,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고루 사랑을 베풀었다.
이제 백상 장기영 형은 갔다. 그러나 그가 공들인 일들, 그리고 정들인 사람들은 백상 생전의 웅지를 받들어 영생의 탑을 세울 것으로 믿는다,
다기로운 내외정세 속에서 이 땅의 활로를 활짝 열고자 저마다 노력하고 있는 이때, 백 상 장기영 형의 넓고 기운차고 활달한 모습을 잃었다는 것은 이 나라의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장기영 형의 명복을 빌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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