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부없는 살림살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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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어느 판사부인이 가정부의 손에 살해된 끔찍한 사건은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자기 집 가정부에게 목 졸려 비명에 간 부인은 말할 것도 없고 횡액을 당한 가족들의 불행도 이를 데 없겠거니와 부모의 사랑 속에 세상모르고 자랄 한창나이에 남의집살이를 하다가 끝내는 무서운 죄를 짓고 일생을 망쳐버린 한 소녀가정부의 신세 또한 가련하다.
모든 가정은 이번 사건의 주변을 살펴보고 심각한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개발원 (KDl)의 조사에 따르면 77년1월 현재 서울의 가정부 수는 자그마치 8만9천l백여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당연히 주인가족과 가정부와의 관계, 주부와 가정부와의 가사에서의 한계, 가정부의 대우문제 등을 하루빨리 합리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명랑한 사회를 이룩하는 중요한 과제임을 알 수 있다.
농촌의 생활 수준 향상으로 이른바 무작정상경 가출소녀의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또 공장에의 취업 기회확대 등으로 가정부를 구하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가정부들의 요구는 무척 까다롭게 되어 『세탁기·냉장고·전화와 TV가 있느냐』,『식구가 단출하냐. 『월급을 얼마. 주겠으며, 일요일 외출을 허가하겠느냐』등 따져 기분에 맞아야만 된다.
콧대가 높아져 걸핏하면 그만두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급료 인상을 요구하기 일쑤인데, 이 때문에 오래 잡아두기 위해 몇 달치 월급을 선불하고 장기 계를 들어주는 등 가히 「가정부상전」이라 해도 좋을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주인가족과 가정부와의 긴장관계는 물론 가정부 탓만은 아니고 주인가족들이 인간적 대우를 잘 해주지 않을 뿐더러 갖가지 학대를 하는데서 생겨나는 경우도 못지 않게 많다.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하녀 「카추샤」는 젊은 귀족「네플류도프」에게 유혹당해 사생아를 낳고 해고돼선 매춘부로 되곤 마는데 우리나라의『영자의 전성시대』에도 극명하게 묘사되고 있는 이같은 가정부의 비운 또한 비일비재한 것이 아닌가.
이처럼 많은 부작용을 낳기 일쑤인 가정부를 꼭 두어야만 할 것인가. 가정부의 인격적 측면에서도, 또 가정주부들의 가사에의 전념을 위해서도 가정부제도는 점차 없어져야만할 추세에 있다.
가정부를 안 둘 경우, 불편한 점도 물론 많을 것이나, 이점 또한 적지 않다. 흔히 여유 있는 일부 집안에선 주부가 모든 가사를 가정부에게만 맡겨놓고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동창회다 계모임이다 하고 몰려다녀 문제가정을 만들어 내고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맞벌이 부부같이 절실한 경우 등도 있겠으나 월2만원 내지 4만원까지 가정부비용으로 나갈 뿐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무형의 손실 또한 크다는 점에서 가능한 한 가정부를 두지 않는 면에서 집안 살림을 꾸려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가정부가 불필요한 생활조건을 갖추는 일이 선행조건 임엔 틀림없다. 갖가지 가전제품의 대량보급으로 주부들의 가사의 고역이 많이 덜어진 것이 사실이긴 하나 아직 충분한 휴식을 취하거나 취미생활을 하기는 어려울 만큼 고된 일손을 가게 하는 잡일이 너무 많다.
하루 삼시 세끼 익혀야 하는 번거로운 식생활도 개선해야하고 불편한 재래식부엌 구조도 고쳐야하며 요즘 문제되고 있는 「연탄4부제」도 「2부제」로 환원돼야 하며 또 가사를 주부에게만 맡기고 방관하는 습관도 고쳐 가장을 비롯한 온 식구들이 함께 거들고 협조하는 생활태도도 확립돼야 하겠다.
이와함께 가계부담 줄고 신경 덜 써도 되는 시간제 파출부를 일손이 바쁠 때 적절히 활용하는 일도 필요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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