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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에 진 남화의 큰별-「최후의 화선」허백련 화백 영전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의재는 나보다 한 살 위의 87세니까 내년이면 미수를 맞는다.
나와는 60년 지기로 의기가 상통하던 화우다.
며칠전 그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금새 달려가 그의 두툼한 손목을 잡고 『날세, 나야』하고 문병하고 싶었지만 마음만 있을 뿐 촌보도 옮기지 못할 만큼 내 자신이 아파 있었다.
그런지 불과 3일만에 부음이 날아들었다. 제 설움에 겨워서 운다고 하지만 의재를 잃은 슬픔은 필설로 헤아리기가 어렵다.
의재는 화선일 뿐더러 이조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지닌 온화한 선비라는 점이다. 화가이기에 앞서 뜻도 있는 선비로서 평생을 살았다. 그는 해방 이후 광주 무등산에 들어간 뒤 30여년을 춘설헌에 묻혀 시종 화필과 같이했다.
몸소 가꾼 춘설차를 손수 달여 마시며 손과 마주앉아 하얀 수염을 홑 날리면서 구수한 전라도사투리로 후진을 이끌어왔다.
내가 의재를 처음 만난 것은 1922년 제1회 선전 전람회장에서였다.
그때 그는 「하경산수」·「추경산수」·「우후산수」 3점 을 냈는데 「추경산수」가 동양화부에서 최고상을 차지했다. 그것이 곧 화단에의 영예로운 등단이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단우 이용문의 도움으로 그와 함께 북경여행을 하던 일이다.
의재는 새로 맞춰 신은 구두가 작아 구두독 때문에 여행 중 발병을 얻었다. 그래서 그만을 떼어놓고 청도로 가다가 되돌아와 얼싸안고 울던 일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퉁퉁 부은 아픈 다리를 이끌고 그를 부축해 북경의 문화전· 무학전· 박물관 등을 살펴보던 우정을 이제 누구와 마주앉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북경까지 와서 그 유명한 미남 배우 매난방을 못보고 가서야 쓰겠냐』면서 기어이 아픈 다리를 끌고 나가 암표를 사 오기도 했다.
지난해 겨울에 개인전에 내놓을 『매난방』을 그리면서 의재 생각이 문득 떠오르더니 그날 밤 꿈에 의재를 보았다. 생시에 그리던 정이 꿈에서 해후한 것이리라.
이제 의재도 가고 허전함만이 남는다. 먼저 간 길의 명복을 비오. 【김은호<동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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