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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의 역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 나라의 도읍은 교통의 중심이고 군사상의 요새, 그리고 지세가 뒷받침하는 요건을 갖추고 있다. 교통과 군사상의 요충이라 해도 좋은 산천과 넓은 평야가 수반되지 않고는 큰 나라의 도읍지는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요건은 서울·개성·평양·경주·부여가 다 지닌 셈이며 공주와 강화가 일시의 천도지로 그친 것도 요건의 미비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은 차문섭 교수(한국사·단대)에 따르면 군사적 이유와 새 세력의 규합이라는 두 가지 면이 있다. 고구려가 만주 남쪽 통 구의 국내 성으로부터 평양으로 옮긴 것은 중원이 통일되면서 북쪽에서 압력을 받게 되어 남쪽으로 세력을 뻗으려는 방편이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밀려 서울 남한산성으로부터 공주·부여로 계속 옮겨 앉았다.
그런데 신라는 1천년 역사에 한번도 천도해 본 적이 없다. 신라가 군사적으로 약할 때에는 타협해서 견디었고 안으로 국기가 뭉쳐 있었던 점에도 이유가 있다. 다만 수도가 남쪽에 치우쳤던 까닭에 삭주·서울·부서·전주·김해에 5경을 두었다.
고려 태조가 철원에서 궁예를 꺾자 고향인 송도(개성)를 수도로 삼았다. 고향의 토착세력에 기반을 두고 왕권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3대 정종이 왕규일파를 토벌하고 난 뒤 서경(평양)으로 옮기려 했고 또 인종 때 이자겸의 난 후에도 묘청의 책동에 솔깃해 했다. 그것은 반대파의 소골로부터 벗어나 새 세력을 규합하려는 생각으로 해석된다.
이 태조가 건국하면서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것도 역시 인심을 새롭게 하여 기틀을 잡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는 무엇보다도 풍수도참이 앞섰던 것 같다. 무악(연세대 앞)은 배산임수의 명당이나 터전이 좁다던 가 계룡산은 너무 남쪽에 치우친 데다 유 수가 좋지 않아 초석을 놓다가 말았다는 일화 등 이 그러하다.
역사가 바뀌고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이지만 정도와 천도의 이치는 크게 변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요즘 제기된 천도 얘기는 군사적인 이유로 풀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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