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애의 부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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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무애(양주동 박사의 아호)는 스스럼없이 자신을「국보」라고 불렀었다. 제자들이나 주위의 사람들이「국보교수」로 별칭 하는 것을 오히려 흐뭇해하기까지 했다.
무(무)애는 언젠가 한 잡문에서 그 별칭이 육 당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말을 한일이 있었다. 1937년, 그는 신라향가의 해독을 둘러싸고 일본의 저명한 한국학연구자인 소창진평 교수의 오류를 지적했었다. 그후 1942년엔 역 저『조선고가연구』를 저술했다.
그 무렵은 일제의 탄압으로 겨레의 통분이 최고조에 이르렀었다. 육 당은 그의 공들인 저작을 보고『국보적 존재』라고 칭찬했다는 것이다.
무애는 소탈한 성품이 지나쳐 때로는 세인의 오해를 사는 일도 없지 않았다. 우선 스스로를「국보 시」하는 학자적 우월감이 그랬고, 그것이 만년에는「정치교수」로까지 번졌었다. 1965년 한-일 회담 반대와 관련해 그는「정치교수」의 한사람으로 40여 년간의 교수생활에서 물러앉았었다.
소탈한 면모의 하나는 평생에 한번도(?)「외상원고」는 집필한일이 없는 것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가 잡지사의 원고집필청탁을 받으면 사전에 원고의 단가(얼마이상)와 선불을 조건으로 하고 승낙했었다. 이것은 한때 거의 예외 없는 그만의 특권이 되다시피 했다.
그 때문에 무애의 모습은 어디서나 찾아 볼 수 있었다. 모든 잡지의 지면과「라디오」·TV 그 어느 것도 가리지 않았다.
자신의 조건에만 어긋나지 않는 한 그는 마다하지 않고 출연하고, 집필했다.
6·25동난 중에는 피난지에서 영어강습소 강사로도 명성을 높였다. 영어 구문 법(도해 식 영문법)은 한때 모든 학생들의 필독참고서가 된 일도 있었다. 국문학을 연구하면서도 일본 「와세다」대 영문학부를 졸업한 실력을 유감없이 과시한 것이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해마다 5월「어머니 날」이면 누구나 즐겨 부르는 노래『어머니의 마음』은 바로 그의 작사이기도 하다.『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 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이 애틋 시가는 그 자신의 또 다른 인간적인 편모를 보여주는 것도 같다.
-『단, 「국보」의「보」가 바보의 약어로 이 나라의 으뜸가는「바보」의 뜻이라면「반생 물위에 이름자를 써 왔다」는 나 혼자의 술회에도 맞으매…』
교단을 떠나 야에서 지내며 그는 이런 심정도 무슨 글에서 토한 적이 있었다. 통재·문재·변재를 함께 지녔던 그로서도 때론 인간적인 고독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 그의 부음을 들으며, 그 소탈한 음성도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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