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불황 비상 걸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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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중국음식점에 가보면 양파 인심이 예전만 못하다. 그도 그럴 것이 3월 양파값이 지난해 같은달에 비해 세배가 뛰었기 때문이다. 배추와 무도 1년 새 서너배씩 올랐다.

LG유통 측은 "산지의 작황이 좋지 않아 공급이 달리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다 유가 상승으로 물건 값이 줄줄이 오르고, 학원비.도시가스.병실료 등 각종 서비스 요금도 치솟고 있다. 이에 따라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가 동시에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저성장 속에 경제가 활력을 잃는 디플레이션이 더 문제라는 시각도 나온다. 어느 쪽이든 경제는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게 경제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스태그플레이션 조짐=통상 소비와 투자가 줄어드는 경기 하강국면에는 물가가 안정된다. 그러나 경기가 나쁜데도 외부 요인에 의해 물가가 오르는 기현상이 스태그플레이션이다.

1970년대 1, 2차 석유파동 때 전세계적으로 나타났다. 개인들은 소득이 줄고, 실업이 늘며 기업은 수익성 악화로 부도가 이어진다.

우리는 79년 2차 석유파동 때 큰 타격을 받았다.

80년에 정정 불안이 겹치면서 경제성장률은 2.1%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소비자물가는 28.7%나 급등했다. 당시 경제팀이 당장의 고통을 감수하고 안정화 정책을 편 결과 3년 뒤인 83년에야 물가 상승률을 3.4%까지 낮출 수 있었다.

그 뒤 20여년 만에 다시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고개를 드는 것이다. 이상만 중앙대 교수는 "단순히 한두달의 물가 동향이 아니라 지속적인 흐름으로 볼 때 물가는 오르고, 경기는 하락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며 "스태그플레이션에 진입했다고 판단한다"고 진단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북핵 문제와 이라크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물가 상승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이번 유가 상승은 예전 석유파동 때처럼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라크 전쟁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디플레이션 우려도=경제전문가들이 지난해부터 우려해온 게 저성장.저물가의 디플레이션이다. 실제로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고, 올 들어 성장률이 뚝 떨어지며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다.

그래서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기우에 그치더라도 경기가 계속 침체되며 디플레이션이 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부동산 버블(거품).가계대출 문제다. 지난해 정부가 지방.대통령 선거를 의식해 돈을 계속 풀어 내수를 부양하는 바람에 부동산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경기가 위축돼 부동산 값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은행 부실채권 증가, 가계파산 증가→소비.투자 위축→경기 침체의 악순환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일본이 지난 10여년 간 버블이 깨지는 과정에서 겪은 장기 복합불황의 복사판이다.

정문건 삼성경제연구소 전무는 "1970년대는 석유류가 세계 교역량의 25%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10%미만이어서 유가 상승에 따른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며 "스태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이 더 우려된다"고 말했다.

◆어떤 경우에도 대책이 마땅치 않다=스태그플레이션은 특효약이 없다. 물가가 오르면 금리를 올려 시중 돈을 거둬들여야 하지만 경기 침체로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국제 유가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 그래서 과거에도 전세계 국가가 2~3년씩 고생했다.

이번에는 더더욱 금리 인상을 고려하기 어렵다. 가계대출이 위험수위여서 금리를 올렸다가는 이자 부담이 급격히 늘어나 소비를 더 위축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오문석 LG경제연구원 상무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해서는 금리 인상처럼 과민한 물가안정정책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경기 침체를 막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디플레이션 대책도 마땅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경제에 활력을 주기 위해 금리를 내리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으나 이미 시중에 돈이 넘쳐 있어 돈을 더 푸는 것은 위험하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정문건 전무는 "수요는 줄고, 재고는 계속 늘어나는 등 불황의 초입단계"라며 "지금 금리를 조정하기 어려우므로 적자재정을 감수해서라도 재정의 역할을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현곤.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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