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사랑은 아픔을 같이 하는 참여이건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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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눈발이 날리는 날씨 속에 옷깃을 여미면서 세모의 발길이 제법 바빠진 우리는 또 한해를 보내고 있다.
이 때가 되면 우리는 수많은 자선이니 위문이니 하는 「슬로건」밑에 베풀어지는 행사며 활동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사는 우리의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행위」임에 틀림없다.
많은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기도와 복음 선교 활동을 통해, 혹은 사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웃을 향한 관심과 기초적 경험을 쌓아 왔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이웃에의 참여」를 실현해야 한다고 다짐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이웃들은 간단한 기도나 관심의 대상으로 그칠 수 없다 .교회가 흔히 가르쳐 온 대로 단순한 전도의 대상이나 구호 물자를 나누어주어야 하는 대상도 아닌 것이다.
전통적인 교의는 너무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웃사랑을 값싸게 이용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의 이웃과 현실 속의 이웃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현실 속의 이웃은 우리의 손길도 미처 닿지 못하는 어둡고 깊은 곳에, 혹은 찬바람 몰아치는 노변에 쓰러져 있다.
그런데도 전통적 「그리스도」인들은 이 어두운 현실을 온실 속에서 생각하거나 바라보려고만 한다. 또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좀 도와주기만을 기대하거나 가르치고 있다. 이런 사랑이나 관심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사랑도 아니고 관심도 아니다.
우리의 많은 이웃은 굶주리고 몹시 아픈 존재이며. 혹은 절망 속에 허덕이는 존재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이미지」를 심심하면 찾아가거나, 때가 되어 생각날 때면 찾아가는 방문의 대상 이상으로 생각지 않는 경향이 없지 않다. 서로 주고받기를 기대하며 또 서로 말썽 관계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대상의 이웃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며 세상인 것도 같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이웃의 문제는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라는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 교회는 우리의 사회가 그 본래의 사명을 잃고 약한 이웃을 얽어 가두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참(진리)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짜여져 가는 현상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교회는 어서 되찾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오늘의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느냐, 혹은 「바리새」인이나 「레위」인 같은 허울좋은 인간이 되느냐 하는 것을 결단하여야 한다.
참「사마리아」인이 된다는 결단은 곧 이웃에 대한 참사랑의 참여임을 의미한다. 만일 교회가 이 결단을 하지 못한다면 가면의 이웃사랑을 설교하거나 혹은 어물어물 못 본체 넘겨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웃에 사랑을 베푼다거나,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결단과 참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아픈자와 함께 아파하는 사명이 있는 것이다.
옛날 「모세」가 그의 고난받는 민족을 구출하려고 애급 왕 「파라오」앞에 섰을 때의 상황은 우리의 사명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진정으로 그 이웃을 사랑한다면 겉으로의 문제 해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그 불행과 아픔과 고통의 원초적인 원인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 철저한 사랑의 의지로 신념의 외길을 걸어갔으며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을 각오해야 했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에는 바로 그 의지와 결의가 언제나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승리란 아픔을 견디고 이기는 주님의 사랑에 있었으며 그러기에 그의 이웃사랑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 인류를 덮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이천환 ▲54세 ▲영국 「켄터배리」 신학대학원 졸업 여왕으로부터 c·b·e 훈위 받음 ▲현 대한성공회 전국 의회 의장·성공회 서울 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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