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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하려면 화끈하게 … 1등들의 M&A 동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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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22일(현지시간) 제약시장은 쏟아지는 초대형 인수합병 소식에 들썩였다. 스위스 제약회사 노바티스가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항암제 사업부를 접수했다. 덩치에 걸맞게 판돈도 컸다. 인수대금은 160억 달러(약 16조6000억원). 거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노바티스는 갖고 있던 백신사업부를 글락소스미스클라인에 71억 달러를 받고 넘기기로 했다. 사실상 맞교환이다. 바로 이틀 전 미국 제약사 화이자가 영국 아스트라제네카를 인수하겠다며 1010억 달러를 불렀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21일 캐나다 제약업체 밸리언트가 주름 치료제 ‘보톡스’ 제조사로 유명한 앨러간을 인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터였다.

 시장의 관심은 화려한 주인공의 면면에 쏠렸다. 화이자 미국 1위, 글락소스미스클라인 영국 1위, 노바티스 스위스 1위, 밸리언트 캐나다 1위…. 세계 1위 아니면 자국 1위다.

‘1등만이 살아남는다’. 인수합병 시장이 한층 살벌해졌다. 제약업계에서만 통하는 얘기가 아니다. 세계 1위와 2위 기업이 결합을 선언하거나 각 나라 1위 회사끼리 국적 상관없이 뭉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인수합병 시장을 지배하는 키워드는 위기감이다. 수십 년 1등 자리를 놓고 경쟁한 적과 손을 맞잡아야 할 만큼 상황이 다급해졌다는 얘기다. 선두에서 추락할 수 있다는 절박감 때문에 독과점 규제를 살필 여유도 없다. 사양산업이거나 시장이 포화상태에 빠진 업종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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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7월 미국 1위 광고회사 옴니콤과 프랑스 1위 퍼블리시스가 통합을 선언했다. 세계 2, 3위였던 두 업체의 합병이 마무리되면 영국 WWP를 제치고 단숨에 세계 최대 규모 광고사로 올라서게 된다. 미국 인터넷·케이블TV 시장에서 1위와 2위를 차지하고 있던 컴캐스트와 타임워너케이블은 올해 2월 합병에 합의했다. 1, 2등의 결합은 이 밖에도 많다. 선두를 탈환하거나 1위 자리를 공고히 하려고 독보적 기술을 갖춘 후발주자 인수에 집중했던 과거와는 크게 달라진 양상이다.

 전 세계 인수합병 시장은 2008년 금융위기의 충격을 딛고 살아나는 중이다. 거래 건수도 늘었고 금액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올해 1~3월까지 7432건 총 8365억5000만 달러 규모의 인수합병이 성사됐다. 1년 전과 견줘 44%(액수 기준) 급증했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2008년 9월) 전 수준을 회복했다. 보통 경제위기가 끝나면 고비를 넘기지 못한 회사들이 매물로 나온다. 인수합병이 활발해질 수밖에 없다. 수치상으로 보기에 금융위기 상처는 아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흉터는 남았다. 기업들이 인수전에 나서는 목적부터 달라졌다. 성장보다 생존이다. 시장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회사도 예외가 아니다. 넉넉한 현금을 바탕으로 선두 회사 사냥에 나서는 기업이 늘었다.

 화이자만 해도 100조원 넘는 뭉칫돈을 들고 국가대표급 제약사를 찾아다니는 중이다. 아스트라제네카 인수는 답보 상태지만 화이자의 도전은 계속될 전망이다. 성사만 된다면 2500억 달러 몸집의 유례없는 대형 제약사가 탄생한다. 화이자의 조바심엔 이유가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특허 절벽(patent cliff) 때문”이라고 했다. 화이자에 큰 수익을 안겨다 주고 있는 대부분 약품의 특허기간이 끝났거나 만료를 앞두고 있다. 특허기간이 종료되면 다른 제약사가 성분이 같거나 더 향상된 복제약(제네릭 의약품) 제조가 가능하다. 원조 약품의 매출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화이자를 세계 1위 제약사 위치에 올려놨던 비아그라가 대표 사례다.

비아그라를 비롯한 ‘블록버스터’ 약품 특허가 끝나자 전 세계에서 복제약이 쏟아졌고 화이자의 매출은 곤두박질했다. 2010년 677억 달러에 이르는 의약품 판매액으로 압도적 1위 자리를 지켰던 화이자였지만 2011년 671억 달러, 2012년 590억 달러로 줄었다. 지난해엔 467억 달러로 매출이 더 감소해 노바티스(574억 달러)에 1위 자리를 내주고 독일 바이엘(526억 달러)에도 밀려 3위에 만족해야 했다. 약품 관련 규제가 강해지며 제품 판매와 개발 환경이 나빠진 점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WSJ은 “화이자뿐 아니라 노바티스 등 다른 대형 제약사도 몸집을 키우고 경쟁력을 유지하려고 인수합병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주 합병 결렬 소식이 전해졌던 캐나다의 광산업체 배릭골드와 미국의 뉴몬트마이닝의 처지는 더 급박하다. 금광 채굴에서 세계 1위와 2위를 점유하고 있는 두 회사는 350억 달러 규모의 합병을 추진했다. 점점 나빠지는 수익성이 원인이었다. 2012년 이후 배릭골드와 뉴몬트마이닝 매출은 계속 줄었다. 세계 경기가 살아나며 안전자산인 금값까지 떨어져 부실을 키웠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배릭골드의 총부채는 131억 달러, 뉴몬트마이닝은 67억 달러 정도다. 합하면 200억 달러에 육박한다. 경쟁 대신 힘을 합쳐 부실을 떨어내고 사업효율성을 높이려는 목적에 두 회사는 합병을 선택했다. 내리막길을 걷던 시멘트 시장에서 고전하던 세계 최대 시멘트 회사 홀심과 프랑스 1위(세계 2위) 라파즈도 비슷한 이유에서 결합을 결정했다.

 이렇게 선두 기업 간 인수합병이 잦아지면서 독과점에 대한 우려 역시 커졌다. 컴캐스트의 타임워너케이블 인수 건은 미국 상원 사법위원회와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에 두 달째 묶여 있다. 두 회사가 합치면 시장점유율은 30% 이상으로 치솟는다. 초대형 통신사 등장으로 경쟁이 줄어 가격이 올라갈 것이란 관측에 미국 소비자 여론도 나쁘다. 뉴욕타임스(NYT)는 “컴캐스트가 ‘이번 인수로 케이블TV·초고속 인터넷에 있어 소비자 선택이 제한되는 일은 절대 없다’며 설득에 나섰지만 별로 효과는 없다”고 설명했다.

 옴니콤과 퍼블리시스도 세금 문제에 가로막혀 아직 합병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새로 출범하는 퍼블리시스옴니콤이 미국이나 프랑스가 아닌 네덜란드에 본부를 두려고 해서다. 세금을 아끼려는 목적이란 의혹이 제기돼 양쪽 정부로부터 조사를 받는 중이다. 국경을 초월한 각국 1등 기업 사이의 결합이 늘어나는 또다른 이유로 ‘절세(節稅)’ 꿍꿍이가 있다는 해석도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유야 어떻듯 (1, 2위 간 인수합병으로) 시장에서 경쟁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투자자에겐 좋을지 모르겠지만 소비자나 공급자에겐 아니다”며 “규제당국이 강력하게 대처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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