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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완장의 손, 폭풍 질주 … 차붐 신화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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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20일 열린 뉘른베르크와의 원정경기는 레버쿠젠 공격수 손흥민이 독일 분데스리가 진출 이후 101번째 경기였다. 오른쪽 팔뚝에 검은색 완장을 차고 나와 세월호 희생자들의 아픔을 나눴다. [뉘른베르크 로이터=뉴스1]
차범근

차범근(61)이 썼던 전설을 손흥민(22·레버쿠젠)이 이어가고 있다. 독일 축구계에 폭탄 같은 충격을 안겨줘 차붐(Cha-bum)으로 불렸던 선배처럼 손흥민은 손세이션(Sonsation)이라는 신조어의 주인공이다. 손흥민의 성(姓) 손(Son)과 ‘Sensation(선풍)’이라는 단어를 합성해 독일 등 해외 매체에서 신문 제목 등으로 사용한다.

 20일 열린 레버쿠젠의 뉘른베르크 원정경기. 손흥민에게 왜 손세이션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경기였다. 레버쿠젠이 2-1로 앞선 종료 10분 전, 자기 진영에서 공을 잡은 손흥민은 약 70m를 폭풍처럼 질주했다. 뉘른베르크 수비수가 안간힘을 다해 추격했지만 공을 몰고 가는 손흥민을 잡을 수 없었다. 문전에서 골키퍼가 앞으로 나오며 각을 좁히자 손흥민은 옆으로 슬쩍 공을 찔러주었다. 동료 에미르 스파이치(34)는 텅 빈 골대로 가볍게 공을 차 넣었다.

 빠른 발과 드리블 중에도 스피드가 줄지 않는 테크닉, 더 좋은 위치의 동료에게 아낌없이 기회를 양보하는 희생정신, 부드러운 볼 터치 등 손흥민의 장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장면이었다. 뉘른베르크 골키퍼가 골문을 비우고 일찌감치 튀어나온 것은 손흥민의 강력한 슈팅을 봉쇄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독일팀 감독이었던 루디 푈러 레버쿠젠 단장은 “손흥민의 플레이는 가레스 베일(25·레알 마드리드)을 보는 듯하다”고 극찬했다. 베일은 메시·호날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잠재력이 크다. 고액 이적료 때문에 ‘1억 유로의 사나이’로 불리기도 한다. 손흥민의 활약 덕분에 레버쿠젠은 4-1로 뉘른베르크를 일축했다.

  이 경기는 손흥민의 분데스리가 101번째 경기였다. 손흥민은 분데스리가 100번째 경기였던 헤르타 베를린전(4월 13일)에서도 도움을 기록하며 2-1 승리를 이끌었다.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본 차범근 SBS 해설위원은 “지난 시즌에 봤을 때보다 손흥민이 더 발전했다”며 흐뭇해했다. 차 위원은 손흥민에 대한 애정이 깊다. 그는 지난해 “ 손흥민이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 내 젊을 때 모습이 순간순간 겹쳐진다”고 고백했다. 손흥민이 자신에 이어 분데스리가에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차 위원에게 큰 기쁨이다.

 손흥민은 동북고를 다니다 2008년 축구협회 유소년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고 분데스리가 함부르크 유소년 팀에 진출했다. 이게 인연이 돼 함부르크에 정식 입단, 2010년 10월 쾰른과의 데뷔전에서 골을 터트리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18세의 어린 나이였다. 차 위원은 고려대-신탁은행을 거친 뒤 공군 소속이던 1978년 다름슈타트에 입단했지만 한 경기만 뛴 후 병역 문제가 꼬여 국내로 돌아왔다. 26세였던 이듬해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해 본격적으로 독일 생활을 시작했다.

 손흥민은 100경기 동안 29골, 차붐은 36골을 기록했다. 출전하는 경기마다 거의 교체되지 않고 뛴 차붐과 달리 손흥민은 교체된 경기도 많았다. 그래서 출전 시간당 득점은 손흥민이 차 위원을 앞선다. 손흥민은 229분에 1골, 차 위원은 244분에 1골을 넣었다.

 차 위원은 “손흥민이 어디까지 성장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계속 성장해 나간다면 나를 능가하는 선수가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차붐은 89년 은퇴할 때까지 308경기에 출전해 98골을 기록했다. 과거에 비해 다른 나라 리그로 이적하는 게 훨씬 많아졌지만 손흥민이 분데스리가를 떠나지 않는다면 30세가 되기 전에 차붐이 독일에서 세운 기록을 넘어설 전망이다. 지난 시즌 함부르크에서 33경기 12골을 넣은 손흥민은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이번 시즌 29경기에서 9골을 넣으며 2년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눈앞에 두고 있다.

  브라질 월드컵은 손흥민의 첫 번째 월드컵이다. 차 위원은 “큰 대회를 치르고 나면 자신감이 더 붙기 마련”이라고 기대했다. 차붐은 33세였던 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처음 출전했다. 차붐과 달리 20대 초반 손흥민에게는 월드컵 경험이 발전의 촉매제가 될 전망이다.

 한편 손흥민은 뉘른베르크와의 경기에 검은색 완장을 오른팔에 차고 나왔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를 애도하는 의미다. 20일 열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김보경(25·카디프시티) 역시 검은색 완장을 차고 나왔다. 손흥민은 골을 어시스트한 뒤에도 골을 넣은 스파이치에게 달려가지 않고 세리머니를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손흥민은 "난 조국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고 느낀다. 가능한 많은 실종자들을 구조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독일 익스프레스지는 “손흥민이 끔찍한 선박 사고 희생자에게 골을 바쳤다”고 보도했다.

이해준·김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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