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도예사의 결정적 자료|신안 앞 바다서 쏟아져 나온 송·원대 보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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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중국 남송에서 원대에 이르는 세계 제1급의 도자기가 우리 나라 서남해안의 바다 속에서 수백 점이나 한목에 인양됐다. 수 백년간 해저에서 잠자던 보물선의 놀라운 발견이다. 한반도에는 땅 위에만 역사적 보물이 무수히 묻힌 것이 아니라 바다 속에까지 깔려있다는 새로운 입증. 아직은 이 발굴이 시작에 불과한데, 계속 탐색해 선박까지 찾아낸다면 그야말로 세계적「뉴스」가 될만한 해양고고학의 개가다.
도자기 수백 점을 바다 속에서 발견하기는 세계에서도 드문 일이다. 수심은 20m에 불과, 작업도 비교적 용이하고 또 뻘 흙 속엔 별의별 것이 다 묻혔을 가능이 있다.
고고학자 김원룡 박사(서울대 인문대)는 이번에 목포 가까운 신안 앞 바다에서 발견된 도자기 중엔 중국 동남부 절강성의 용천요에서 나는 청자가 압도적인 양을 차지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밖에 백자와 도기류에 속하는 것도 있긴 하나극소수에 불과하다.
옛 중국에서 국제무역항으로 첫손꼽던 항주 가까이에 있는 이 용천요는 남송 때부터 원대에 이르기까지 청자로 명성을 떨친 중국 제1의 청자 고장. 김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의 도자기는 당송시대부터 서방 각 국에 수출됐는데 그 중에도 가장 많이 수출돼 널리 퍼진 것이 용천의 청자와 이웃 경덕진의 청화자기다.
경덕진의 도자기는 원래부터 명·청에 이르며 주로 명대 청화자기를 친다.
이들 2개 고장의 자기는 12세기 전후한 우리 나라 고려청자의 고장인 해남 강진보다는 뒤늦은 것이지만 백자의 발달에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도자기다. 고려청자는 북송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며 남송 도자기는 막상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것조차 변변치 못하다. 고려 후기에 있어서 우리 나라는 중국 도자기를 수입해 쓸 형편이 못됐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선 많은 용천 청자를 수입했으며 오늘날까지 가장 많이 유존한다. 절강성 일대에는 그밖에도 여항·수내사·여수·경령·건요 등 수다한데 그들 제품은 일단 항주로 집산 돼 온 세계로 퍼졌으며 일본으로 가는 무역선은 으레 해류와 바람을 따라 우리 나라 흑산도에서 남해안을 스쳐 구주로 건너갔다.
말하자면 신안 앞 바다의 도자기는 그런 뱃길의 해난사고로 빚어진 자취랄까. 당시의 배는 범선. 송나라사신이 고려의 개경에 이르는 해로도 이 길이었으며 순풍을 만나 5일이면 항주에서 한반도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런 배가 언제 신안 앞 바다에 침몰됐을까 하는 것은 비상한 관심사. 다행히 북송 순화연호(10세기말)와 남송 경원연호(12세기말)가 적힌 동전이 발견 돼 남송 말기가 아닐까 어렴풋이 짚어보지만 그것조차 아직은 미지수다.
엽전 한 두개로 연대 추정은 속단을 불허하며 도자기 자체만으로도 곤란하다는 게 국립박물관 정량모 학예연구실장의 말이다. 무역선이라면 어떤 시기에 인근 여러 가마의 제품을 실었을 것인데 그것들을 서로 비교 검토하는 자료와 시일이 필요하다. 원·명 때의 제품을 분별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김 교수는 『더구나 용천요를 비롯한 남송 및 원대도자기는 편년이 잘돼있지 못한 형편이며 그런 점에서 신안 앞 바다 것들의 연대가 확실해진다면 중국 도예사에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도자기도 중요하지만 생활용품들도 틀림없이 있으리라는 점에서 『한 배의 물건을 일괄해 수습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고분발굴과 마찬가지로 13세기께 문화를 파악하는 세계적 연구자료가 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세밀하고 끈질긴 발굴작업이 계속돼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종석·이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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