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리포트] 돌소리 낭랑…반상의 '女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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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바둑은 축구랑 참 많이 닮았다. 직접 하고 싶은 마음이 쉬이 생기지 않는다. 너무 어렵거나 힘들어 보인다. 구경도 쉽지 않다. 축구에서 골은 가뭄에 콩 나듯 터지고 바둑 관람은 문외한에게 차라리 고문과 같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숱한 남자들이 ‘중독’돼 있다는 것. 반면 많은 여성들에게 이해가 안 되는 건 둘다 마찬가지다. 하지만 축구가 월드컵을 겪으면서 여성을 포용한 것처럼 요즘의 바둑 또한 옛날의 고루한 이미지를 벗고 있다.

최근 TV 바둑 진행을 맡으면서 바둑 팬의 큰 호응을 얻고 있는 한해원(20).하호정(23) 프로 2단. 스무살을 갓 넘은 천방지축 여성 기사 둘이 반상(盤上)에 봄바람을 몰고 왔다.

흑백 화면처럼 칙칙했던 바둑 경기는 '올 컬러'로 탈바꿈했다. 홈쇼핑의 쇼 호스트처럼, TV 연예정보 프로그램의 리포터처럼 톡톡 튀는 바둑 해설을 선보이면서 단조롭던 바둑은 훨씬 재미가 생겼다.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둘을 만났다. 이들이 인류 최고의 두뇌 게임이라는 바둑을 업으로 하는 프로기사라니. 첫인상만으론 오목이나 '알 까기'가 더 어울릴 법한데….(실제로도 기원 안팎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고 한다.)

#'뽀미' 언니 한해원 프로

韓프로는 '공주과'에 가깝다. 헤어 스타일도 바비 인형처럼 갈색 머리카락 끝이 돌돌 말려 있다. 최근까지 한 위성 채널에서 어린이 바둑 프로그램을 진행했다.'뽀뽀뽀'의 뽀미 언니와 같은 역할이었다. 이후로 인터넷에 팬 클럽 홈페이지가 생겼다.

엄숙하고 고리타분한 바둑계에서 韓프로는 철부지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처음 머리를 염색하고 시합에 나섰던 1999년. 어른들(그는 중진.원로 기사들을 '어른'이라고 통칭했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바둑판을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다들 韓프로의 머리를 쳐다보곤 혀를 찼다. 신경이 쓰여 경기를 망쳤다.

가끔 시합에 늦으면 꼭 핀잔을 들었다. '그러면 그렇지…'하는 식이었다. 또래의 남자기사들에겐 그러지 않았다. 위 아래가 분명한 세계라 성큼 따지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는 엄연한 프로다. 사진 촬영 준비를 하다 기자가 바둑판 위에 물건을 잠깐 올렸다. 곧바로 "바둑판엔 바둑알 외엔 아무 것도 올려선 안됩니다"며 나무랐다.

韓프로는 최근 TV 연속극에서 여자 주인공이 바둑을 두는 장면을 처음 봤다며 좋아했다.

"그전까지는 사위와 장인이 바둑 두는 게 세상에 비친 바둑의 모습이었잖아요. 남자만의 전유물이란 이미지가 굳어진 거죠. 앞으로 프로기사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한 순간이었어요."

# 미소녀 전사 하호정 프로

河프로가 초단이던 지난해. 한 TV의 바둑 프로그램에서 중진 기사와 진행을 했다.

중진 기사: "요즘 초단들이 나왔다 하면 9단을 마구 이깁니다."

河프로: "네. 요즘 신예들은 정말 잘 둬요. 저도 초단은 초단인데…."

이후로 河프로에겐 '엽기 바둑소녀'란 별명이 붙었다. 바둑 중계는 오로지 바둑 얘기만 하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락 프로그램처럼 농담도 가리지 않았다.

항의도 적지 않았다. "바둑이 장난이냐" "진짜 프로 맞느냐"는 식의 비아냥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프로기사 생활만 11년째다. 바둑 2단의 별칭은 '어리석어 보이지만 나름대로 움직인다'는 뜻의 약우(若愚). 그의 바둑에 대한 철학은 이렇다.

"바둑을 내기나 잡기로 여기는 건 옳지 않아요. 스포츠죠. 바둑만큼 승패가 깨끗한 스포츠가 또 있을까요? 심판이 끼어들 틈도 없잖아요. 몸을 움직이는 게 약간 적을 뿐이죠. 여자가 바둑 둔다고 다시 쳐다보는 것도 편견이에요. 세상이 변한 만큼 바둑도 변해야 합니다."

그는 한번도 바둑 배운 걸 후회하지 않았다고 했다. 똑 부러지는 말투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그는 4월 1일부터 중국 프로팀에서 뛴다. 한.중.일의 여류 기사들로만 팀이 꾸려졌다. 이름하여 '미소녀 전사들'이다.

손민호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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