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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선원들 브리지 모인 뒤 모두 탈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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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 16일 오전 8시48분. 전남 진도군 병풍도 근처를 지나던 세월호에 이상이 발생했다. 몇 분 뒤 승무원들이 하나 둘씩 브릿지(조종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배의 눈과 두뇌에 해당하는 조종실은 배의 꼭대기층 맨 앞쪽에 위치해 배의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곳이다. 구조 매뉴얼에 따르면 선원들은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자기 위치에서 주어진 승객 대피업무를 해야 하지만 세월호 승무원은 이날 이상징후가 발생한 지 20분가량 지난 오전 9시17분 전에 거의 대부분 이곳에 집결했다. 당시 객실에는 “움직이면 위험하니 방에 대기하라”는 선장의 지시가 반복 방송되고 있었다. 승무원들은 이후 구조 선박이 도착하자 조종실에서 나와 배를 버리고 구조됐다. 세월호의 승무원 29명 가운데 23명이 구조됐다. 특히 이준석(69) 선장을 포함한 선박직 승무원 15명은 전원 배를 탈출했다.

 세월호 침몰 사건을 수사 중인 검·경 합동수사본부는 선원들이 구조 의무를 다하지 않고 조종실에 모여 있다가 대피 지휘를 하지 않고 모두 탈출한 정황을 잡고 수사 중이다. 합수본부 관계자는 “조종실은 가장 높은 곳으로 아래 학생들이 다 보인다”며 “학생들에게는 움직이지 말라고 해놓고 자기들은 모여 구조를 기다리다 평소 익숙한 통로를 이용해 탈출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영국의 버큰헤이드 호 때와 정반대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20일 공개된 세월호와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 간의 교신 내용을 보면 선장 등 선박직들은 사고 당일 오전 9시17분 조종실에 모두 모여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한 검찰 관계자는 “선사의 위기대응 매뉴얼대로라면 선장은 조종실에서 총지휘를 맡고 1항사는 현장지휘, 2항사는 응급처치와 구명정 작동, 3항사는 선장을 보좌해 기록·통신 업무를 담당해야 했지만 모두 무시됐다”고 지적했다.

 1852년 남아프리카로 가던 중 암초에 부딪쳐 침몰한 버큰헤이드호에서는 선장 시드니 세튼 대령의 명령에 따라 세 척뿐인 구명보트에 여자와 어린이부터 태웠고 436명의 군인들은 배와 운명을 같이했다. 이후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이 각종 해상사고의 불문율이 됐다.

 ◆청와대에 문자로 사고 보고=세월호 침몰 사고 초기에 정부 대응이 혼선을 보인 데는 늑장 보고도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안전행정부 중앙안전상황실은 사고가 발생한 뒤 39분이 지나서야 청와대에 문자로 보고해 청와대의 대응이 그만큼 늦어졌다는 지적이다.

 강병규 안행부 장관은 사고 당일 오후 6시30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에서 “(청와대에 사고를 최초 보고한 시점이) 16일 오전 9시31분이 다. 문자로 보고했다”고 청와대 보고 관련 일부 사실을 공개했었다.

 안행부가 운영하는 상황실이 청와대(위기관리센터)에 세월호 사고 발생 사실을 보고한 때는 전남소방본부가 처음 신고를 접수(오전 8시52분)한 뒤 39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세월호와 진도 VTS의 교신 내용에 따르면 상황실이 청와대에 보고할 무렵 진도 앞바다 현장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청와대 보고 24분 전인 오전 9시7분 세월호 측이 “침몰 중, 구조 부탁”이라고 호소했고 오전 9시17분에는 “배가 50도 이상 기울어져 움직이지 못한다”고 알렸다. 이런 참사 와중에 상황실이 강 장관에게는 오전 9시25분 유선전화로 먼저 보고하고 6분 뒤에야 청와대에 문자로 보고했다.

목포=노진호 기자, 이가영·정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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