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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틈새 보고 들어간 채혈기 시장, 그 시장의 35% 차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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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홍관호 GMMC 대표가 18일 서울 구로 디지털밸리에 있는 본사 사옥에서 당뇨 환자용 채혈기를 소개하고 있다. 홍 대표는 “한 손으로 잡기 편하고 피부 통증이 줄어든 채혈기를 개발해 짧은 시간에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았다”고 말했다. [이상재 기자]

한국을 대표하는 의료기기 회사였던 메디슨이 2002년 초 최종 부도를 냈다. 자회사인 인포피아에 근무하던 홍관호(46) GMMC 대표(당시 인포피아 해외수출팀장)는 도리 없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연봉이 많은 팀장급 직원부터 회사에 사표를 내던 시절이었습니다. 먹먹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어요.”

 그런데 바다 건너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이탈리아·멕시코에 있던 해외 파트너와 작별 인사를 하던 중이었다. 미국 측 에이전시였던 마이너 파르한테서 “그러면 우리가 의료기 유통회사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경기도 시흥에 있는 공구상가에 사무실을 임대했다. 컴퓨터 한 대, 전화기 한 대를 놓고 GMMC라는 간판을 걸었다. GMMC는 ‘글로벌 메디컬 마켓 코퍼레이션’의 줄임말이다. 전체 직원은 한국 사무소 1명을 포함해 4명뿐이었지만 나름 ‘다국적 기업’으로 출발한 셈이다. 이때가 2003년 4월이다.

 처음엔 ‘의료기기 만물상’이었다. 현지에서 입찰 공고가 뜨면 나라별로 가격과 성능을 최적화한 제품을 수소문하는 식이었다. 가령 미국 병원에서 중환자실용 의료기를 찾으면 한국에서는 전자의료기를, 멕시코에서는 소모성 자재를 찾아 공급했다. 나중엔 앰뷸런스·헬리콥터까지 팔아봤다.

GMMC의 채혈기는 바늘이 가늘어 ‘세상에서 가장 덜 아픈 채혈기’로 꼽힌다. [사진 GMMC]

 “수시로 e메일을 주고받으니까 사업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어요. 시차 맞춰서 통화하는 게 고역이지요(웃음). 그러다가 매년 11월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리는 국제의료박람회인 ‘메디카’에서 만나는 겁니다. 모든 구성원이 1년에 딱 한 번 얼굴을 맞대고 회의를 하는 셈이지요.”

 지금 이 회사는 당뇨 환자용 채혈기를 주력으로 만들고 있다. 채혈기는 이름 그대로 환자가 스프링식 볼펜처럼 버튼을 눌러 손수 피를 뽑는 의료기구다. 여기서 5~50㎕(마이크로리터)의 혈액을 채취한 다음 혈당 측정기에 넣어 혈당·콜레스테롤·헤모글로빈 수치 등을 측정한다. 혈당 측정기에 달려 있는 보조 의료기기라서 시장이 얼마나 크겠나 싶지만 전 세계 판매량이 한 해 2억 개가 넘는다. 시장의 95%를 로슈·존슨앤드존슨·바이엘·애보트 등 4대 글로벌 제약사가 점유하고 있다. 쉽게 비유해 4개의 메이저 프린터 업체가 소모품인 잉크까지 휩쓸고 있다는 얘기다.

 “대형 업체가 시장의 95%를 점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르지 못할 산같이 까마득하지요. 하지만 거꾸로 보면 메이저들도 차지하지 못한 ‘5% 시장’이 존재한다는 뜻이지요. 채혈기는 혈당 측정기에 부속된 액세서리 같은 겁니다. 의료기기 시장의 ‘틈새’라고 할 수 있는데, GMMC는 ‘틈새의 틈새’를 노려 독립 상품으로 특화한 거지요. 그런데 틈새의 틈새가 한 해 1000만 개, 금액으로 치면 1000만 달러(약 100억원)에 이르니 나름 솔깃한 시장이지요.”

 GMMC가 채혈기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2006년이다. 홍 대표는 “신생 업체로는 드물게 1호 제품부터 성공시킬 수 있었다”고 자랑했다. 글로벌 영업맨들이 창업한 회사답게 고객 요구에 재빠르게 대응한 것이 주효했다. 먼저 멕시코에 있는 할레한드라 그로프에게서 연락이 왔다. 기존 120㎜이던 제품 길이를 짧게 줄이자는 아이디어였다. 한 손으로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소비자 불만을 반영하자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근무하면서 유럽지역 영업을 맡고 있는 아나리자 리코는 외형·포장 디자인을 맡았다.

 이들과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홍 대표는 대전 유성에 있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을 찾아갔다. 어떻게 하면 덜 아프게 주사를 놓느냐가 그의 숙제였다. 많게는 하루 여섯 차례나 손수 피를 뽑아야 하는 당뇨 환자에게 채혈은 말 그대로 고역이다. 주삿바늘의 각도와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깊이를 어떻게 조절하느냐, 부품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느냐가 핵심 기술이었다. 홍 대표는 “신제품 개발 단계에서 박영서 KISTI 원장이 방문하면서 문제가 하나둘 풀렸다”며 “KISTI가 보유한 수퍼컴퓨터를 활용해 바늘 굵기, 각도별 혈액 추출량 등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GMMC가 선보인 채혈기는 길이가 106㎜, 바늘 지름이 0.6㎜로 가늘면서도 통증이 덜하도록 부품을 개선한 게 특징이다. 이 회사 제품은 겨우 13개 부품으로 구성되는데 세계 특허가 11개나 된다. 홍 대표는 “멕시코에서 날아온 아이디어와 이탈리아의 디자인, 한국의 정보기술이 결합하면서 금세 ‘세계에서 가장 덜 아프게 채혈을 하는 회사’로 주목받았다”고 말했다.

 시장 판도도 바뀌었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국내 채혈기 시장은 GMMC가 거의 100% 장악했다. 서울 금천구 디지털밸리로 본사를 옮기고 경기도 안산에 공장을 마련하면서 1명이던 이 회사의 국내 임직원은 38명으로 늘어났다. 지난해 생산량은 350만 개, ‘5% 시장’에서 점유율 35%로 세계 2위다. 세계 1위는 연 400만 개를 공급하는 중국 업체다. 홍 대표는 “최근 굴지의 메이저 업체로부터 품질 인증 의뢰가 왔다”며 “이를 통해 공급 계약이 성사된다면 앞으로 매출 500억원대 회사로 성장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최근엔 일회용 채혈기인 ‘안전란셋’ 시장에 도전하고 있다. 당뇨 환자를 위해 가정용으로 개발된 게 채혈기라면, 병원에서는 감염 방지 등을 위해 일회용 채혈용품(란셋)을 사용하는 게 세계적인 추세다. 이미 미국과 유럽·일본 등에선 안전란셋 사용을 의무화하고 있다. 누가 더 안전한 제품을, 누가 더 싼값으로 제공하느냐가 경쟁력이다. 홍 대표는 “채혈할 때 통증이 적으면서 혹시라도 실수로 (란셋을) 두 번 사용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잠금 구조’를 강화한 신제품을 내놓아 해외에서 호평받고 있다”고 말했다.

 “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한 방울도 안 되는 혈액으로 전립선·콜레스테롤·고지혈증·심근경색·빈혈 등을 검사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일회용 란셋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다는 의미입니다. 별것 아닌 소모품이라고요? 폴란드에 있는 HTL이 단가 50원짜리 안전란셋 하나로 연간 2500억원 매출을 올리고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이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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