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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뒤서 벌어지는 화국봉 체제의 산고-문답으로 풀어본 중공내 홍의 전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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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공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렬한 모사후의 권력투쟁은 중공사회의 밀폐성 때문에 외부에서는 맹인 코끼리 만지기식의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다음은 강청파의 체포설이래 폭주한 중공관개 보도들을 종합해서 이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도록 문답형식으로 간추린 것이다. <외신부>

<쿠데타 미수설의 발단>
이 「쇼킹」한 소식은 11일 밤(한국시간 12일 아침) 「런던」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영국의 「데일리·텔리그래프」지는 북경주재 「니겔·웨이드」특파원의 특종기사를 1면「톱」으로 보도했고 「더·타임스」와 「파이내셜·타임스」지도 비슷한 내용을 보도했다. 그러나 이 소식이 세계에 알려진 것은 AFP통신 「런던」지국이 11일 밤11시30분(한국시간 12일 상오8시30분)신문보도들을 재빨리 전재한데서 비롯됐다.
강청 등은 지난7일에 체포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0일께부터 북경시내에는 이들의 체포에 관한 풍문이 구전으로 파다하게 퍼졌으며 11일 중공을 방문한 「마이클·소마레」 「파푸아-뉴기니」수상을 영접하는 자리에 강경파지도자들이 한사람도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소문을 강력히 뒷받침했다.
영국신문들은 북경의 각 공장과 하부행정조직내의 정치조직원들이 지난 주말의 특별「브리핑」에서 이들의 체포사실을 통고 받았다고 보도했고 미국무성과 일본외무성도 지난 10일 이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었다.
중공외교부대변인은 12일 화국봉 수상의 당 주석임명을 공식 발표하면서 「쿠데타」설에는 「노·코멘트」했다.

<몇가지 의문점>
지금까지 전해진 단면적인 보도들은 강청일파는 모의 사망 후 모의 유서를 자기파에 유리하게 조작하다가 현장에서 모의 경호대장 왕동흥에 의해 검거되었다고 전하고있다.
여기서 첫째 의문은 모 생전에 강경파의 영향력이 비교적 강력했을 때 권력장악을 시도하지 않고 모의사후에 그와 같은 조잡한 방법을 쓰려했다는 것이 의심스럽다. 둘째 모택동의 심복이었고 강경파의 일원으로 알려져 온 왕동흥이 태도를 표변, 화국봉 세력에 가담, 지금까지의 동료인 문혁파 검거에 앞강을 서게된 동기가 무엇이었느냐는 점이 의심스럽다.
또 체포된 것으로 알려진 인사이의의 강경파들, 즉 기등규·진영귀·예지복 등 당정치국 「멤버」들의 동정에 대한 시사가 분명치 않다는 점이다.

<화국봉의 정체는?>
호남성의 부성장에서 9년만에 당 주석으로 급성장한 화의 출세이유는 나이나 출신지처럼 수수께끼다. 그의 정책성향도 확실하게 분류하기 어렵다. 그는 문혁기간 중에 큰 활약을 했고 그후 정치국원·부수상 겸 공안상이 됐다.
공안상으로서 경찰권을 쥐고 있었다면 중공내정에 그의 영향력이 상당할 것이다. 그는 흔히 문혁파로 간주되나 보다 실제적이라는 평이다. 따라서 그는 온건파와 강경파사이에 제3의 중도노선을 걷고있다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당 주석임명과 강경파체포가 그의 주도하에 이뤄졌다면 그의 지위는 상당히 튼튼할 것이고 그를 정점으로 한 온건체제가 장기적으로 유지되겠지만 그가 온건파에 떠밀려 강경파를 제거한다면 과도적 지도자로 그치고 말 것이다.

<위조설 도는 모의 유언>
지난2일 「홍콩」의 우익계 「공상일보」가 북경에서 「홍콩」인사에게 우송된 「북경통신」이라는 인쇄물에 근거를 둔 것이라면서 모택동의 유언내용을 공개했다. 그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정치국이 3자 지도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3자 지도체제에 강청을 참여시키느냐는 문제는 정치국이 결정할 문제다. 강청이 홍기를 휘날리도록 도와야할 것이며 그가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명심시켜야한다.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것은 절대권을 휘두른 데 대한 벌일는지 모르나 반란이 없으리라는 것은 다행한 얼이다.
그러나 국내외의 적이 있으므로 아직 기뻐할 때는 아니다. 언제 무슨 사건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유언은 강청파가 강청을 주석으로 추대하기 위해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강경파의 여력은?>
이번에 체포됐다는 강청 등은 강경파의 최고핵심분자들이다.
북경시를 경비하는 8341부대장 왕동흥(정치국원·모택동의 경호책)민병조직의 지휘관 예지습(정치국 후보위원)등도 문혁파출신의 강청파에 속했다.
정치국의 구성비를 보면 20명의 위원 및 후보위원가운데 12명이 문혁파로 우위에 있었으나 화국봉의 당 주석임명이 정치국에서 이루어졌다면 문혁파의 상당수가 강경 노선에서 이탈, 화의 중간노선에 동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상해출신의 강경파들만이 고립됐다는 추측이다.
강경파는 국무원의 수상·부수상 및 장관급 38명 가운데는 7명, 11명의 지방 군구사령관 중 2명뿐이어서 문제가 안된다.
그러나 가장 주목거리는 홍위병세대, 북경대·청화대 등의 급진학생들과 상해등 대도시의 젊은 노동자, 민병들이다. 이들이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할 수 있을는지가 문제다.

<근년숙청사례와 공통점>
중공 권력투쟁의 특징은 예외 없이 국내의 정책을 둘러싼 논쟁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 권력투쟁의 결과는 공격대장이 완전히 실각한 뒤에도 사당한 기간을 경과한 다음에야 공식화되곤 했다.
66년 문화혁명때의 국가주석 유소기, 71년 「쿠데타」 미수 후 비행기로 탈출하다 사망한 임표, 올봄의 등소평의 경우가 다 그랬다. 이들의 실각을 외부에 구체적으로 알리는 경로는 처음에는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한 외신보도나 『대자보』였다. 그리고 나서는 인민일보나 당 이론지 「홍기」가 공격대상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반모사상』 『수정주의』 『자본주의추종자』를 공격하는 장문의 논설을 게재, 대자보운동과 병행하여 장기간 반복한끝에 공식화하곤 했다. 유소기의 경우 이 과정이 2년, 임표는 10개월, 등소평은 2개월 걸렸다.
실각설서부터 공식화되기까지의 이기간은 반대세력의 축출 내지는 무마에 걸린 시간을 뜻한다.

<군의 역할은?>
강경파의 정상급 체포와 그후의 숙청사업에 군이 깊이 개입, 중요역할을 하고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화국봉에 대한 충성심에서가 아니라 강경파에 대한 군독자적인 입장 때문이라고 설명되고있다.
문혁을 달갑지 않게 여겨온 군부는 강경파가 홍위병이나 민병을 조직·활용하면서 군의 근대화요청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온데 불만이 컸었다.
문혁 후 당의 지방조직이 파괴되고 중앙지도부가 분열돼있어 무정부사태가 발생했을 때 거의 중요성과 역할은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 하북지진이나 항주의 노동자폭동때 이를 수습한 것이 군이었고 당 지도자들도 군의 업적을 공개적으로 찬양, 군의 환심을 사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왔다. 화국봉도 군에 대해서는 큰 영향력이 없다.
임표 패망 후 군의 주류는 제2야전군계열이다. 유백승(정치국원) 등소평·이선념(부수상)을 비롯여 진석련(북경) 이덕생(심양) 양용(신강) 우태충(내몽고)등 군구사령관이 모두 제2야전군 출신이며 지금 그 정상에 있는 것이 이선념이다. 군은 모택동 없는 중공에서 권력의 중요근원이 될 것이고 각 파벌간의 권력투쟁에서 중요한 「캐스팅보드」가 될 것으로 평가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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