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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소죽 임병직형/이원순<한미협회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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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소죽 임병직 형. 며칠 전 병상으로 형을 찾았을 때형은 평상시와 같이 온화한 얼굴에 웃음을 띠고 반가와 하면서 담소했읍니다. 그래서 형이 세상을 떠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음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을 달리하다니 정말 무상합니다. 90이 다된 오늘날에야 비로소 인생의 허무함을 처음 맛보는 감이 듭니다.
형은 누구보다도 애국을 하신 분입니다. 일찍이 나와 같이 한국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일하던 때 벌써 형은 우국의 충정이 가득 했습니다. 이 애국단심을 달래고 웅지를 달성키 위해 도미하였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다시 상해로 건너가 이승만 박사와 김구선생 영도하의 임시정부에서 일하셨고 그 때의 울분과 초조함은 형의 회고담 중에 빠지지 않았읍니다.
그후 다시 미국에 가서 애국운동을 계속하셨으니 한국인 동지회에서 주도적 임무를 띠고 선두에서 일하던 일도 기억에 뚜렷합니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불철주야 동분서주, 혼신 노력 하셨읍니다.
건국 후 외무부장관·한일회담수석대표 또는 주「유엔」대사 등으로 외교일선에서 국위선양에 이바지한바 지대 했읍니다.
최근에는 반공연맹책임자로서 반공사상고취에 심혈을 쏟으셨으니 우리 나라 반공사상 뚜렷한 족퇴을 남기시었다 할 것입니다.
이제 형의 80여 평생을 회고하건대 해방전의 형은 문자그대로 열렬한 애국활동으로 일관하였고 해방 후에는 가장 양심적이고 사가 없는 정치가·행정가로 일해왔다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형과 나는 70년 교육의 친우로 간담이 상조하고 의기상합 하는 이른바 지기지우라 많은 일을 같이하여 형영이 상수하는 처지가 아닙니까?
정말 우리 나라 인물가운데 형과 같이 고고하고 양심적인 참된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직 남북이 갈라진 대로 있고 국내외로 많은 일이 산적하여 형과 같이 유위유능한 인재를 더욱더 필요로 하는 이때형이 홀연히 타계하시니 사적으로는 물론이요, 공적인 입장에서도 애통함을 금할 길 없읍니다.
생로병사는 필연적 운명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도 허전하고 너무도 무상합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다시 무엇을 부질없이 말하리요.
저승에 가셔서도 그 불타는 애국심을 어찌하지 못하여 일야로 돌보아 주실 줄 믿사오나 이제는 모든 것을 잊으시고 고이 쉬시기를 기원합니다.
삼가 소죽형의 명복을 빌면서 형을 추모하는 마지막 인사에 가름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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