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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김규식인가…“정치 양극화 극심, 그 통합정신 새길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시절의 이승만과 김규식(왼쪽부터) [중앙포토] 우사 김규식. 1945년 해방 이후 이승만·김구와 함께 ‘우익 3거두’로 꼽히며 독립운동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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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해방공간의 불꽃 격돌…‘승부사’ 이승만은 하지를 어떻게 눌렀나
━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광복 75돌 잊혀진 인물 ‘하지 미군정 사령관’을 찾아서 해방공간이 열렸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다. 정치 무대가 펼쳐졌다.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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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03.25] 초대 주미대사 장면 임명
기록1949.03.251949년 미국 워싱턴D.C에 주미 한국대사관개설. 초대 주미대사로 장면(1899~1966) 임명.주미한국대사관 개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미외교를 수행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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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직후 국내외에 임시정부 속속 수립 … 망국으로 위축된 민족의 자존심 회복
? 1920년 12월 28일 상해에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 환영회가 열리고 있다. 이승만(가운데)의 곁에 카이젤 수염을 기른 국무총리 이동휘(왼쪽)와 내무부장 안창호(오른쪽)가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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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요약 ⑧
3·1운동 직후 국내외 각지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국내에서만 한성(漢城)·기호(畿湖)·평안도에서 임시정부가 결성되었고, 러시아령과 상해에서도 각각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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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두 기둥’ 이승만·이동휘, 돈 문제로 내분 촉발
1920년 12월 28일 상해에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 환영회가 열리고 있다. 이승만(가운데)의 곁에 카이젤 수염을 기른 국무총리 이동휘(왼쪽)와 내무부장 안창호(오른쪽)가 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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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 33인 가족부터 돕자" 부인들도 열성
1915년 호놀룰루 비숍 박물관에서 열린 국민회 창립기념식 퍼레이드. 독립금 공고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왼쪽과 가운데)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독립금예약서 예약인 심연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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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애국지사 박용신 선생
애국지사 박용신(사진) 선생이 28일 별세했다. 94세. 고인은 1941년 경성 중앙방송국 아나운서 시절 동료들과 함께 해외 단파방송을 몰래 청취, 방송 내용을 녹취했다.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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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편지 3158통 첫 공개
“대통령(우드로 윌슨)과 2~3분의 면담 시간을 갖게 주선해 주십시오. 직접 밀봉 문서를 전달하고 싶습니다.”(1919년 3월3일, 윌슨 대통령의 비서에게) “나는 한시라도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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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부터 건국까지 '이승만을 다시 보자'
1921년 4월 중국 상하이에 머물던 시절의 이승만. ◆ 독립운동부터 '이승만 다시 보기'=1970~80년대는'반(反)이승만' 시대정신이 지배적이었다. 이 전 대통령을 기리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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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박사 워싱턴 집무실 찾았다
1919년 이승만 (李承晩) 박사가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미국 워싱턴에 설치한 외교기관인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건물이 발견됐다. 이민 1백주년 워싱턴기념사업회(회장 박윤수)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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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정수립 80주년] 임시정부 초기 재정실태
13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을 맞는다.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 (上海)에서 출범한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공화정체이자 대한민국 탄생으로 그 법통성이 이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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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연세대 '이승만 문서' 공동 출간
3.1운동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이르는 과정을 생생히 보여주는 이승만 (李承晩) 박사 관련 미공개 문서들이 자료집 형식의 책으로 엮어져 처음 일반에 공개된다. 광복절인 15일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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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親美 성향 강했지만 사대주의자 아니다”
정부 수립 50주년을 맞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발자취를 재조명하는 국제학술대회가 13일부터 이틀 동안 연세대 알렌관에서 열린다.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이 전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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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歐美위원부 발족
이승만(李承晩)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근거로 외교 독립운동을 했다.그는 워싱턴에 설치한 자신의 활동본부를 「한국위원회」라 칭했다.「한국위원회」는 3.1운동때부터 해방 이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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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한공화국 대통령 이승만
이승만(李承晩)박사는 3.1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한국 역사상최초의 민주정부 대통령이 되었다.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자천(自薦)이 아니라 타천(他薦)에 의해서였고,또 미국에 있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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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凡 외교卓見 증명할 자료-새로찾은 金九문서 내용.의미
국가보훈처가 13일 공개한 임시정부관련 「美국무부문서파일 895」중에는 金九선생의 서신과 駐中 美대사관에서 본국 국무성에보고한 金九선생의 태평양전쟁 1주년기념선언문외에도▲임시정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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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묘소 LA서 7位 확인-국가보훈처 수집반
대한민국 임시정부 歐美위원부 위원을 지낸 鄭翰景선생(1891~1985)등 독립운동가 7위의 묘소가 새로 확인됐다. 국가보훈처는 지난달 미주지역에 해외독립운동사료 수집반(반장 李善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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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냉전으로 ″어부지리〃
일제말기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계속했던 4대세력은 과연 무엇을 이루었는가. 당시 4대세력 「김구와 임시정부」「무정과 화북조선독립동맹」「이승만과 구미위원부」「김일성과 항일유격대(빨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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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읽어버린 36년|임정조직과 활동(하)
임시정부는 내외의 도전에 계속 부대꼈다. 외교노선과 무장항일등 방법론의 차이, 지역간 대립등 파쟁도 끊이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마주쳤던 위기의 하나는 22년 만주·시베리아지역의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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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백년」의 주역들(17)「대한인국민회」
1912년11월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시 페리가의 한 3층건물에 모인 북미·하와이·시베리아·만주에서 온 1백여명의 해외거주 한인대표자들은『대한민족의 복리도모와 국권회복을 위한 범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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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2)제74화 한미외교 요람기(7)
이승만 박사는 비록 「F·루스벨트」대통령이나 국무성으로부터 푸대접을 받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성취하지는 못 했으나 그를 돕는 훌륭한 미국인 친구를 많이 갖고 있었다. 워싱턴의 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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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8)|한미외교 요람기(4)-윌러메트대 입학
하와이에서 이승만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도 그 때의 장면이 뇌리에 선할 정도로 큰 감명을 남겼다. 이 박사는『지금 우리민족의 앞 길어 암담한 것처럼 보이나 곧 미국이 일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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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소죽 임병직형/이원순
소죽 임병직 형. 며칠 전 병상으로 형을 찾았을 때형은 평상시와 같이 온화한 얼굴에 웃음을 띠고 반가와 하면서 담소했읍니다. 그래서 형이 세상을 떠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