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작 '천년학' 촬영 들어간 임권택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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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7일 오전 10시 전남 광양시 다압면 매화마을. 임권택(69) 감독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천진한 아이처럼 마냥 즐거워한다. 전날 내린 비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말끔히 사라지고 하늘은 화창하기만 하다. 매화마을 산중턱에서 바라본 건너편은 도원경이다. 굽이굽이 섬진강이 흐르고, 그 뒤로 청산이 우뚝 서 있다.

▶ 남도의 선경에 취한 임권택 감독은 우리 모두 좀더 여유있게, 호흡을 늦추며 살아가자고 말했다.

▶ 전남 광양시 매화마을의 `천년학` 초가집 세트. 그 아래로는 섬진강이 흘러간다.

임권택 감독의 액션 사인이 떨어졌다. 대형 선풍기 바람을 맞은 순백색 매화 꽃잎이 사방으로 휘날린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카메라에는 순간 꽃잎의 군무가 펼쳐진다. 판소리 CD를 틀어놓고 화면을 주시하던 임 감독이 "비경일세, 비경이야"라고 소리쳤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날갯짓을 시작했다. 6일 매화마을 초가집 세트 촬영을 시작으로 1년여의 장정에 들어갔다. 임 감독은 사실 바람 틈새 하나 없을 만큼 흐드러진 매화를 찍으러 이곳에 내려왔다. 하지만 무심한 자연은 6일 반갑잖은 봄비를 뿌렸다. 만개한 꽃 촬영을 내년으로 미룬 감독은 대신 흩날리는 꽃잎에 앵글을 맞췄다. 찌푸렸던 하늘이 개니 섬진강 건너편 경남 하동군의 지리산 자락도 한눈에 잡힌다. 생명을 다해 대지로 떨어지는 꽃잎과 세월에 아랑곳없이 의연한 산하가 생사고락의 섭리를 매섭게 일깨운다.

'천년학'은 임 감독을 국민감독 반열에 올린 '서편제'(1993년)와 맥을 같이하는 영화다. 이청준 단편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한 소리꾼 아버지와 눈먼 딸, 그리고 이복 남동생의 얘기를 다룬다. 아직 캐스팅은 확정되지 않았으나 감독은 벌써 영화에 들어갈 보조화면을 찍으며 얼개를 짜기 시작했다.

"늘 숙제처럼 남아있었던 영화여. '서편제' 당시에는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었거든. 하늘로 비상하는 학을 영상으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했고, 원작의 몽환적 분위기를 소화할 능력도 없었어. '서편제'가 성공한 뒤 주위에서 속편을 만들어라, '동편제'를 찍어라 등등, 숱하게 요구했으나 지금까지 기다려왔지. 이제야 '한번 저지를 수 있겠다' 하는 자신감이 붙은 게야."

'천년학'의 축은 '서편제'에서 헤어졌던 눈먼 소리꾼 송화와 그의 남동생이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소리를 하는 누나, 그리고 소식 끊긴 누나를 찾아 남도 바닷가의 선학동 주막에 들른 남동생의 기구한 사연을 판소리 가락에 옮겨놓으며 우리네 서글픈 삶을 위로할 작정이다. 사계절 색을 달리하며 아름다움을 뽐내는 이 땅의 자연도 오롯이 담긴다.

"왜 다시 옛날 얘기를 하느냐는 사람도 있어. 하지만 그건 오해여. '천년학'은 '서편제'와 완전히 달라. '서편제'에서 못다한 얘기를 꺼내거나, 그 연장선에 있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어. 요즘 우리가 얼마나 쫓기며 사는가, 얼마나 여유가 없는가, 이런 것을 그릴 생각이야. 리듬.구성 등이 기왕의 내 영화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속도를 늦추고, 자기를 되짚으며 살자는 것이야."

임 감독은 '서편제'의 배우도 거의 다 바꿀 작정이라고 말했다. 연기력을 확실히 갖추고, 소리도 할 수 있는 배우를 찾고 있다는 것. '서편제'의 오정해, '춘향뎐'의 조승우를 발굴했던 그가 이번엔 어떤 카드를 꺼내들지도 기대되는 대목이다.

감독은 판소리의 각별한 인연도 공개했다.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년)를 배급하며 약간의 돈을 만진 그의 먼 사돈 아저씨가 고맙다며 술 한잔을 사는 자리에서 '병신춤의 대가' 공옥진씨의 소리와 춤을 접하고 마음 깊은 곳을 정통으로 때리는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어려서부터 요즘 아이들이 가요를 즐기는 것처럼 판소리를 들어왔으나 '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 이후 판소리는 그의 안에서 자라고 성장해 '서편제'가 되고 '춘향뎐'으로 태어났다.

"100번째 작품, 물론 부담스러워. 일단 주위에서 관심이 크잖아. 하지만 '서편제'만큼 편하게 찍은 것도 없어. 사실 '태백산맥'(94년)을 먼저 하려고 했는데 정부가 막는 바람에 노느니 일하자며 시작한 게 '서편제'였거든. 이번에도 그렇게 찍고 싶어. 영화 한다고 정신없이 쫓겨온 내 호흡을 늦춰보는 뜻도 있겠지."

그 순간 광양만 바닷가에서 날아온 갈매기 한 마리가 섬진강 물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좋다, 좋아." 정일성 촬영감독이 추임새를 넣었다.

광양=글.사진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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