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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발족정신과무고|투서·무고는 총화의 공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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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고발정신과 무고. 고발정신은 권장되어야할 덕성이고, 무고는 사회에서 추방되어야할 해독이라고들 얘기한다. 그러나 실제로 언뜻 보아 고발정신의 발로인지, 무고인지 구별이 모호한 때가 상당히 있다. 실상 무고도 고발정신이란 명분으로 분장하려드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고발정신과 무고를 구분할 기준이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고발정신이 사회에서 불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부정추방 의지에 바탕을 두고있는 반면 무고는 남을 비방한다는데 주안점이 있다. 다시 말해 고발정신이 나와 너를 포괄한 사회전체의 도덕성 제고에 뜻을 두고 있는데 비해 무고는 나와 너란 대립적 관계에서 너를 비방하고 해하려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발정신에는 투철한 책임감이 요청된다. 아무리 스스로는 자기의 행동을 고발정신에 입각했다고 생각하더라도 사실과 어긋난 것을 무책임하게 들고나섰다면 이미 고발정신의 발기라 할 수는 없다.
우리 나라는 절대 왕권이 군림하던 시절에도 선비들에 의해 건전한 고발정신이 고취되어온 전통이 있다. 자기 목을 칠 도끼를 미리 가져다 놓고 행한 직언충간의 상소가 그치지 않았던 전통이 바로 그것이다. 사관한 선비뿐 아니라 포의 에게도 허용된 이 상소는 국정의 비위와 무능을 고발하고 서정을 혁파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제도를 사용한 사람들이 사원이나 사욕에서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를 정화하겠다는 투철한 책임감과 용기를 가졌을 때 이 제도는 사회에서 온갖 불의를 몰아내는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책임감이 결여된 사람에 의해 사리와 공략의 도구로 이 제도가 이용될 때에는 한낱 무고와 음해의 수단으로 타락했다.
조선조 8대 예종 때 유자광에 의한 남이 장군의 역모조작과 11대 중종 대의 기묘사화는 모함의 대표적인 예.
남이 장군은 세조 치하에서 이시애 난의 평정과 여진족 호평으로 26세에 병판자리에 오른 인재였다. 그의 공과 출세를 시기한 유자광 등이 예종 원년에 남장 군이 북벌 때 지은 시중『…남아이십미평국…』이란 구절을 『…남아이십미득국』으로 변조, 역모혐의로 고변했다. 이로 인해 남이와 강순 등이 역모혐의로 처형되었고, 모함꾼 유자광은 그 후에도 무오사화를 주모, 사림파를 제거하는데 앞장서는 등 악행을 거듭했다.
혁신정치를 주장한 조광조 일파를 몰아낸 기묘사화는 궁중정치의 기계의 희생물. 조광조의 반대파들은 우선 궁궐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이란 글을 써 두었다. 주초 즉 조씨가 왕이 된다는 암시다. 벌레가 꿀 묻은 곳을 갉아먹자 이 나뭇잎을 임금에게 보여 임금의 마음을 동요시킨 뒤 연 이은 모함상소로 조광조를 죽이고 그 일파를 정권에서 몰아냈다.
무고와 음해는 당쟁·사화 등 궁중정치의 과정에서 다반사처럼 이용되었고, 이러한 악습은 우리의 생활 습관을 적지않이 오염시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의 민주사회에서도 건전한 고발정신은 시민이 갖춰야할 덕성으로 더 한층 강조되고있다. 불의를 용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의 피해를 무관심하게 지나치지 않고, 자기의 정당한 권리를 귀찮다고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의를 추방하겠다는 책임감과 용기를 갖춘 시민정신의 발로란 전제하에서다.
숙원을 풀기 위해 남의 작은 비행을 들춘다든가, 자신은 법과 규범에 어긋나는 일을 자행하면서 남에게만 이를 강요하려는 행위여서야 얘기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허위사실을 날조하여 남에게 해를 끼치려해선 시민정신의 타락을 넘는 범죄행위가 된다. 이러한 행위야말로 고발정신의 고발 대상이 될 불의이며 사회악인 것이다.
우리 주변에선 부정부패 일소가 강조될 때면 으레 남을 음해·모함하는 무고가 만연되곤 했다. 근자에도 정부가 서정쇄신 노력을 강화하면서 당국에 갖가지 투기가 몰려들어 내무부에만 하루 평균 20건이 답지했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수사의 단서가 될만한 것도 전혀 없지는 앉으나 약85%가 허무맹랑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연전에 서울시경이 2년 반 동안 접수한 각종 진성서·투서·탄원서 9천9백10 건 중 36%를 점하는 3천2백26건이 무고로 밝혀진 적이 있다. 그중 대부분의 무고는 무기명 투서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게 이 사회에 난행해 온 무기명 투서란 무책임하고 유해한 무고행위가 대부분이었다.
이 같은 투서와 무고행위의 폐해를 꼽자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사회의 균열을 가져온다. 너와 나를 넘는 더 큰 대의-사회라도 좋고, 민족이라도 좋고, 국가라도 좋다-를 도외시하고 너와 나의 대립이 강조되면 분열을 가져올 것은 뻔한 이치다. 이는 사회의 응집력을 해체시키고 불신감을 팽배시킨다. 그러한 사회풍토 속에서 사회의 통합성과 민족의 결속을 기하기란 불가능하다. 요즘 특히 강조되고 있는 국민총화의 공적이 바로 투서·무고로 나타나는 음해풍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투서·무고행위는 인력의 낭비를 수반한다. 쓸데없는 무고와 투서의 사실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정부의 행정력과 수사력이 낭비될 뿐 아니라 조사를 받느라 무고한 국민들이 물·심·시간의 피해를 보게 된다. 더구나 무고행위로 이득을 보는 사람이 생기게 되면 노력해서 이루려는 생각보다 기계로 상대를 끌어내리려는 폐풍이 만연될 위험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런 뜻에서도 정부가 책임감이 결여된 무기명 투고를 수사의 단서로 삼지 않을 것은 물론 접수조차 하지 않기로 한 것은 심사숙고 끝에 나온 조치로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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