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제국으로의 향수를 넘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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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세력균형의 틀과 내용이 크게 바뀌는 국제정치의 전환기에는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이 세상을 뒤덮게 마련이다. 지금이 바로 그와 같은 위험한 고비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위기 국면에서는 미래지향적 전략 개발보다도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제국으로의 향수에 취해버리기 쉽다. 제국주의 시대와 냉전 시대를 새삼 ‘좋았던 시절’로 회상하며 그때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즈음에는 푸틴 대통령이 이끄는 러시아와 아베 총리가 앞장선 일본의 움직임에서 제국주의 시대와 냉전 시대의 영광에 대한 강한 향수의 증후를 보게 된다. ‘소련의 해체는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참사’였다고 단정한 푸틴으로서는 지난날 냉전 시대 강력한 리더십으로 세계를 양분하며 미국과 맞섰던 소련에 비해 오늘의 러시아가 초라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기에 왕년의 러시아제국이 누렸던 영광을 되찾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크리미아 사태에서 보여준 그의 결단력과 강수는 러시아문화의 전성기를 만들어낸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와 무모한 모험주의로 러시아의 고립을 자초했던 니콜라이 1세(Nicolas I) 가운데서 어느 쪽을 모범으로 삼고 있는지는 속단하기 쉽지 않다. 그러기에 푸틴의 ‘제국으로의 향수’가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단하기 어려운 것이다.

 한편 일본 아베 총리의 경우는 지난 150년 일본이 지나온 두 시기에 대한 역사의 재평가가 새로운 국가전략 선택을 밑받침하고 있는 듯싶다. 1868년 이른바 메이지유신으로 시작된 첫 시기에는 성공적인 근대화와 서양화의 시도로 일본제국을 구미열강의 반열에 올려놓고 아시아의 패권국가로 성장시켰으나 전체주의적 군국(軍國)화란 비싼 대가를 치르며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두 번째 시기는 1945년 패전 이후 모범적인 민주국가로서 한 세대 만에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여 G7 참여는 물론 유엔을 비롯한 수다한 국제기구와 협력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며 경제·문화대국으로 자리매김된 최근 69년의 역사다. 2년 전 국제적 세력균형의 불안정과 후쿠시마 대지진의 후유증 속에서 등장한 아베는 메이지유신으로 시발하였던 일본제국에 대한 향수를 촉발하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반면에 평화헌법과 민주정치체제로 이룩한 일본의 경제·문화대국의 위치를 어떻게 지구촌과 아시아공동체발전에 활용할 것인가라는 과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것 같다. 역사의 뼈저린 재인식을 주저하며 제국의 향수에만 집착한다면 어렵사리 쌓아 올린 일본의 높은 국제적 위상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듯 왕년의 강대국들이 21세기 국제정치의 불안정에 시달리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급부상하며 가져온 지구촌 세력 판도의 흔들림 때문이다. 수천 년에 걸쳐 아시아대륙의 중원을 차지하고 정치적·문화적·군사적 패권국가로 군림하였던 중국은 150년에 걸쳐 제국주의세력으로부터 극심한 수모를 겪은 끝에 다시 초강대국의 위치로 등극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중국몽(中國夢)을 꾸고 있다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다만 그 큰 꿈이 지난날의 제국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지구촌 시대에 걸맞은 보편적·평화적 정의구현의 기수가 되는 쑨원(孫文)이 강조한 천하위공(天下爲公)을 실현하는 대국의 꿈이기를 국제사회는 기대할 뿐이다.

 20세기는 분명 미국의 세기였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동서냉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은 정치·군사·경제·문화 모든 면에서 지구촌의 유일 초강대국으로 21세기를 맞았다. 그러나 2001년의 9·11사태, 2008년의 금융위기, 2013년 의회정치의 파탄이 야기한 정부기능 마비로 상징되는 국력의 상대적 약화로 국제정치 다극화 시대의 문을 열게 되었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을 의식한 듯 오바마 대통령이 외교안보의 초점을 아시아로 옮기는 전략적 방향전환을 결정한 것은 세계사의 흐름에 순응하는 적절한 선택임에 틀림없다. 다만 소련과 대치했던 냉전시대의 습성에 젖은 미국 여론이 그 시대의 소련과 오늘의 중국을 같은 경쟁 상대로 인식하는 오류는 경계해야 한다.

 우선 지정학적 차원에서 볼 때 소련은 유럽의 변방이었던 데 비해 중국은 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한 대국임을 유의해야 한다. 그보다도 중국의 부상은 이념의 대결 시대가 아닌 시장의 세계화 시대에 진행되고 있으며 시장화는 개방화를 수반하고, 이는 지구촌의 새 평화질서를 미국과 중국이 함께 만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한 꿈이 바로 아메리칸드림이 아니겠는가.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