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용된 공간이 너무 좁고 각박하다|김주영 <작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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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거리를 걸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 마주 걸어온다. 그 많은 사람들은 나를 스쳐 가는 사람들이 아니고 나를 향해 쳐들어온다는 느낌이다. 그런 피해 의식을 유발시키는 상황들은 오늘의 우리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공간이 가속도로 침식당하는데서 오는 저항 반응일 것이다.
공간이 협소해지자, 이웃에 대한 자기 개념도 많이 달라졌다. 이해와 교권의 대상이던 이웃은 경쟁과 질타의 대상으로 바뀌고 말았다. 주고받는 것을 삼가고 각인자가 엿볼 기회가 없도록 몸을 가리고 문을 꼭꼭 처닫는다.
만원 「버스」에서 누에처럼 겨우 기어 내려와서 협소한 「엘리베이터」에 콩나물처럼 실려서 사무실로 올라가면, 나와 경쟁의 대상인 회사의 동료가 바로 맞은편 의자에 딱 버티고 앉아있다. 담배 연기 한번 마음놓고 훅 내뿜을 공간도 허용되지 않는다. 점심을 먹으러가도 역시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 냉면 한 그릇이라도 먹으려면 이건 숫제 싸움이어야한다. 먼저 온 손님이 자리 비우기를 기다려 땅벌처럼 날아서 비집고 들어앉아야 한다.
상대를 느긋한 태도로 바라보며 느릿느릿한 말씨로 서로를 아끼고 염려해줄 틈도 없다. 빨리빨리 취하는 소줏잔을 꼴깍꼴깍 들이마시며 재빨리 명함들을 주고받고 또 다시 만원「버스」를 향해 모잽이 걸음을 쫓아간다.
집에 들어가도 마찬가지다. 조그만 전세방에 옷장 놓고, TV놓고, 책상하나, 전기밥솥 하나 얹어놓으면 겨우 염소 콧구멍 만한 공간이 부부에게 허용된다. 거기서 아내와 정겹고 달큰 하게 살아가는게 아니고 싸우고 지지고 볶아야 한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굳어 있어 살벌하다. 작은 목소리로 얘기하는 사람은 속병이 있거나 꽁생원으로 취급되기 일쑤다. 싸움하듯 살아가야 제구실을 한다. 선택의 여지도 폭도 없다. 이것이 좋을까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벌써 타인이 그것을 가로채 간다.
얼마전, 내연의 처를 토막 살인한 사건이 있었다. 여자를 죽여선 토막을 내어 연탄재에 버무리고 제육처럼 저며서 쓰레기통에 버린, 그야말로 철저하게 엽기적인 살인 방법이었다. 그 살인이 그만큼 엽기적이고 무자비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살인범에게 허용된 공간의 협소함에 있었다고 보는 것은 망발일까. 그것이 전혀 우연으로 저질러진 살인이었다 할지라도 사람이 죽은 이상 범인은 완전 범죄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 완전 범죄는 방과 목욕탕이란 협소한 공간 속에서 이루어져야했다. 만일 그 살인 현장이 강변이나 들판이었다면 그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까진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은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우리들에겐 헤어짐과 이별이란 것이 슬프다거나 안타까움으로 남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시원하고 홀가분한 것으로 느껴진다.
공간의 허용도가 헤어진 만큼 넓어지고 이별한 만큼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의 공간의 변칙적인 자기 시위의 허욕으로 우리를 빠뜨린다. 협소한 상점이나 책방에서 진열된 상품들을 배로 보이게 하기 위해 벽면에다 거울을 비치한다. 그러나 거울에 비쳐 확대된 상품은 어디까지나 착각에 불과하지 진리는 아니다. 거울을 떼어버리면 그 상품들은 반으로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가장 대실한 원상으로 복귀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요염한 사기에 불과하다. 허용된 공간이 좁을수록 우리는 온전한 자기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지혜롭다. 우리에겐 최소한 남을 속이지 않고 살아야할 의무는 있는 것이다. 노름꾼의 돈은 작부가 갉아먹기 마련이고, 무리한 주자는 결국 갈증으로 쓰러지기 마련이다.
◇필자 ▲1939년 경북 청송 출생 ▲70년 「월간 문학」 신인상 수상 ▲『여자를 찾습니다』『머저리에게 축배를』『여름사냥』 등 작품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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