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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꾼과 혼인보 가문 대결, 반상엔 살기마저 감돌아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1986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기성전 도전 2국. 휠체어를 탄 조치훈 당시 기성(棋聖)이 도전자 고바야시를 맞아 첫 수를 놓는 장면. [사진 일본기원]

19세기 일본엔 시미야 요네조(四宮米藏·1769~1835)라는 유명한 내기 바둑꾼이 있었다. 그는 거금 3000량을 바둑으로 벌어들일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고 시대 여건도 좋았다. 52세 되던 해엔 뒷날 명인이 되었던 조와(丈和·1787~1847)와 10번기를 두었다. 사연은 이랬다.

바둑이 지배 계층의 전유물로 널리 애호되던 19세기 초는 바쿠후(幕府) 시대 전성기라 살림은 넉넉하고 마음은 태평할 때였다. 시미야는 일찍이 바둑에 재능을 보여서 지방 유력자의 애호를 받았다. 나이 들어 단위(段位)를 얻고 싶었다. 그러나 단위는 바둑의 4대 가문만이 줄 수 있는 것. 유력자의 이름으로 혼인보(本因坊) 가문에 청을 넣었다. 3단을 받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 당시는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별이 없었다.

혼인보가는 난감해 했다. 알 만한 유력자의 부탁이니 안 들어줄 수는 없다. 들어주자니 바둑을 두어야 한다. 둬 봐야 실력을 가늠할 수 있고 또 적절한 단위도 줄 수 있다. 물론 대국은 요식 행위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시미야의 이름은 이미 강호에 자자했다. 혼인보가 바둑의 첫째 가문이라 해도 가볍게 두다간 질 수도 있다. 그러면 시미야의 명성만 올려주고 혼인보의 이름은 땅에 떨어진다. 사실 시미야가 굳이 나이 들어 단위를 청한 까닭은 자신의 이름을 한번 높이자는 심보였을 거다. 굳이 단위가 없어도 강호에서 이름이 드높았으니 말이다.

조와의 스승 겐조(元丈·1775~1832)는 고민했다. 어찌한다? 아, 그래! 조와가 있구나. 단위는 6단이지만 실력으로는 명인. 이 친구에게 두라고 해야겠군. 그러면 이길 것이 분명하고 어쩌다 져도 6단이니 창피할 건 없다. 그래, 조와가 나가라. 나가서 적당히 어루만져 주라.

시미야가 왔다. 한 바구니 사례금을 싸 들고 와서 배움의 값으로 바쳤다. 대국은 10판으로 하지. 그래, 조와에게 두 점을 놓도록 하게. 시미야는 내심 불만이다. 내기 바둑계에서 적수가 없었던 자신에게, 비록 혼인보가 대단하다 하지만 감히 두 점이나 놓게 해? 조와도 투덜거린다. 험하게 살아온 내기꾼을 접대까지 해? 좋아. 두 점으로 혼을 내 주지!

조와와 시미야는 10판을 기약했다. 대국은 1820년 11월부터 1822년 1월까지 1년을 넘게 끌었다. 빅(비기는 것)이 한 판 나와 조와가 6승4패 1빅을 했다. 참으로 대단한 격돌이었다. 오기와 배짱, 무지와 교활(狡猾)이 반상에 흘러 넘쳤다. 역전, 재역전. 배짱과 힘이 한번 부딪치면 반상은 논리로 흘러가지 않는다. 힘과 힘, 기백과 기백은 서로를 밀어낸다. 반상엔 살기마저 감돈다.

(기보1)은 1821년 1월 25일 7국의 중반. 시미야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장면이다. 그러나 백1(실전 백111) 이후 불과 10여 수 만에 형세는 역전되었다. 앙천(仰天)! 시미야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어떻게 두어도 저 흑이 갇힐 일은 없었건만, 손 따라 두다가 순식간에 대마가 사활에 걸렸다.

(기보2) 흑2, 흑4가 뒀어야 할 유명한 수습의 맥점이었다. 이후는 알파벳 순서.

그러나 두 기사, 한 판, 두 판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를 얕보는 마음이 사라지고 서로를 인정하는 단계로 들어섰다. 긍정하는 마음이 내면에 잦아들었다. 기록이 남아 있다. 시미야가 탄식했다. “조와는 실로 명인의 그릇인가. 두 점을 접히면 천하무적인 줄 알았건만…” 왜 그랬을까.

서로가 마음을 열게 된 것은 바둑의 본질 때문이었다. 두 기사의 인격이 본래부터 넉넉해서 마음을 연 것은 아니었다. 인간적 면모도 없다 할 수 없겠지만 바둑의 힘도 작다 할 수는 없었다.

바둑의 모형은 전쟁. 그러므로 바둑의 본질도 전쟁이다. 두 사람 다 한 판 건다. 이기거나 지거나 그거밖에 없다. 제로섬 게임이다. 제로섬 게임에선 기백이 첫째다.

보라. 조치훈의 얼굴엔 한 판의 바둑에 자신의 모두를 거는, 자신의 전부를 반상에 대입시키려는 의지로 차 있다. 어떤 세상인가. 휠체어에 의지하고라도 두어야만 하는 세상이다.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었다 해서 쉴 수 있던가.

시미야와 조와가 오기와 기백으로 맞부딪친 것은 바로 저 본질 때문이었다. 만약 인간적 면모가 바둑을 앞섰다면, 처음부터 오기를 내세울 이유는 없었으리. 그렇다면 두 기사, 왜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가까워지게 되었을까. 그 또한 바둑의 본질 때문이었다.

언어를 보자. 바둑의 언어는 우리 몸의 반영이다. (두 점 머리를) 두드리고, (팔의 힘으로 상대를 밀듯 돌을) 젖히고, (한 칸 씌워) 압박하며, (그물과 통발을 던지듯 장문으로 상대 돌을) 잡아들이고 (돌을) 따낸다. 반상의 돌싸움이란 그런 것이다. 언어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대국 전 조치훈 기성이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

그러기에 대국이 한 판 끝나면 온몸의 쓰디쓴 감정이 다 빠져나간다. 증오도 오만도 탄식도 다 풀려나간다. 무엇이 남는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가 남는다.

몸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작용 없이는 의식 또한 없다고 신체표지가설(somatic marker hypothesis)이 알려주듯이 감정은 신체를 벗어나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은 신체에 고여 있던 삶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밖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뒤틀린 감정이 허공으로 흩어지면 상대와 나 사이엔 거리가 사라진다.

바둑은 그런 것이었다. 그렇지만 바둑에 대한 이해는 또 다른 문제다. 바둑의 본질이 전쟁이라고? 그러면 병법이 바둑에 통용되는가? 그런 듯하다. “따라서 유능한 이만이 인(仁)으로 지키고 의(義)로 행하며 예(禮)로 질서를 지키고 지(智)로 사리를 판단하는 것이니…대개 포치(布置)는 바둑의 선무(先務)로서 군사들이 진을 치고 적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바둑의 고전 『현현기경(玄玄棋經)』(1349) 서(序)에 나오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병법의 핵심은 궤계(詭計). 궤계란 거짓 정보를 상대에게 흘리는 것. 하지만 반상에 궤계란 없다. 대체 어디에 정보를 숨길 수 있단 말인가. 상대의 모든 꾀는 반상에 다 펼쳐져 있다. 숨길 수가 없다. 싸움에서 진다면 반상의 해석 능력에 차이가 있어 그런 것이지, 상대가 당신의 눈을 가린 때문이 아니다. 그런가. 고대 중국의 문인들이 쓴 소론(小論)을 보면 모두가 다 바둑의 이치를 병법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들은 바둑도 잘 모르고 쓸데없는 소리를 했단 말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니 그럴 수도 있다.

중국의 문인들은 역사와 철학의 세계에서 세상을 바라본 사람들이다. 철학적 이치도 존재하고 사회적 질서도 존재할 때, 이치와 질서가 서로 다른 길을 간다면 이치를 부여잡고 현실의 질서를 틀린 것으로 본 사람들이다.

바둑에서도 그러했다. 도(道)를 다루면 덕(德)을 노래해야 하듯이, 바둑이 있으니 철학이 당연히 있어야 하고 인격도 그에 걸맞게 갖추어져야만 한다. 이것이 그들의 태도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쟁 모형인 바둑을 바라보았을 때 병법에서 바둑의 이치를 찾았다. 물론 바둑에 병법이 적용된다 하더라도 세상이 꼭, 바둑이 꼭 그리 운영된다고 완고하게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하기에 사마천(司馬遷)도 백이숙제(伯夷叔齊)의 고민을 『사기(史記)』의 주제로 잡았었다. 천하에 의(義)라는 것이 과연 기능하는가.

바둑의 이치와 세상사의 이치는 서로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바둑은 바둑, 세상사는 세상사로 서로가 다르다. 중국은 이상과 현실이 괴리를 보이면 관찰을 멈추곤 했다. 이상이 틀릴 리는 없기에 관찰되는 바가 틀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관찰을 통해서 만약 관찰된 바에 일리가 있다면 이상을 조정했다.

조와가 1826년 『국기관광(國技觀光)』을 펴냈을 때, 그는 시미야와의 바둑 11국을 전부 수록했다. 참으로 대단한 배포였다. 책 이름에는 일본의 성취를 종주국인 중국에 과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런 자부를 드러내는 책에 내기꾼과의 바둑을 실었다. 내기꾼이면 어떠냐. 바둑의 내용이 뛰어나면 그것이 훌륭한 것. 『국기관광』은 바둑책이다. 도덕적 판단은 딴 세상 일이다.

일본과 중국의 실력 차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바둑은 중국에서 탄생하고 일본에서 크게 발전했다. 20세기 초 중국과 일본의 차이는 석 점. 일본이 1급이라면 중국은 4급이었다. 차이가 나는 이유 중 하나는, 중국은 세상의 이치가 바둑에 녹아 있는 것으로 이해한 반면 일본은 놀이라는 독자적인 세상으로 바둑을 이해한 데 있었다.

바둑이란 무엇인가. 『현현기경』에 의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바둑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선 바둑은 바둑, 인간은 인간이었다. 그런가. 그렇다면 우린 바둑에 어떤 기운(氣韻)을 담고 있는가. 한 판의 바둑을 둘 때, 우린 손 끝에 어떤 기운을 불어넣고 있는가. 이치를 넣는가, 아니면 바둑을 넣는가.

이치를 넣든 바둑을 넣든 몸과 바둑의 본질을 돌아본다면 알겠다, 하나는 알겠다. 우리가 바둑을 두고 또 두어도 용렬함이 더해진다면, 그건 바둑을 몸으로 두지 않고 머리로 두는 까닭이다.

젊은 시절 작은 절의 일꾼이었던 시미야는 뒷날 다시 절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호(號)를 일생헌무안(一生軒無案)으로 했다. 평생에 꺼릴 것이 없다 했다.



문용직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발견』 『수법의 발견』 등 다수.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 moonros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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