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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의 ‘생각의 역습’] 보이지 않는 감정 조정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70호 29면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접하는 말과 글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다음 문장들을 소리 내어 천천히 읽어보자.

A. 늘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한 여행 같은 삶
B. 그저 죽지 않기 위해 투쟁하는 막장 인생

위의 문장들을 읽으며 당신의 머릿속에서 특정한 이미지나 기억이 자연스레 떠오를 수 있다. 그로 인해 기분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고 혹은 나빠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무엇을 떠올렸든 A의 단어들이 당신의 감정에 보다 긍정적으로 작용할 확률이 높다. 반대로 B의 문장을 읽으면서 당신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짓거나 환호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당신이 원하건 원치 않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생각의 점화와 감정적 전이는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이렇게 무의식 상태에서 벌어지는 생각의 점화는 감정을 넘어 우리의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2009년 한글날을 기념해 MBC에서 제작한 ‘말의 힘’이라는 다큐멘터리는 무심코 접한 단어가 우리의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주었다.

제작진은 실험 참가자들을 두 개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게는 노년을 연상시키는 단어 카드를, 다른 그룹에게는 젊음을 연상시키는 단어 카드를 주었다. 제작진은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단어 카드를 이용해 간단한 문장을 만들도록 한 후 걸음속도를 비교했다.

그 결과 노년을 연상시키는 단어에 노출된 사람들은 실험 전에 비해 실험 후의 걸음이 평균 2.32초 느려졌다. 반면 젊음을 연상시키는 단어에 노출된 사람들은 실험 전에 비해 실험 후의 걸음이 평균 2.46초 빨라졌다. 단어 카드에 의해 점화된 감정이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가볍게 혹은 무겁게 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노출되는 글과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말에 의한 생각의 점화가 우리의 감정과 행동에 직·간접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더욱이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상호작용하며 확대된다. 즉 우리가 노년이 연상되는 생각을 하면 노인처럼 행동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거기에다 노인처럼 행동을 하면 다시 노년에 대한 생각이 강화된다. 우리는 즐거우면 미소를 짓는데, 미소를 지으면 즐거워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 실험연구에서 연필을 앞니로 가볍게 문 실험자들이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 부분을 입술로 오무려 문 실험자보다 똑같은 만화를 더욱 재미있게 생각했다. 연필을 문 실험자들의 얼굴은 본인들도 모르게 웃게 되지만 연필 끝을 오무려 문 실험자들의 얼굴은 자동적으로 찌푸려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실험에서는 사람들을 두 개 그룹으로 나누어 신문의 사설을 음성으로 들려주면서 한 그룹에게는 계속 머리를 끄덕이는 수용적 제스처를 취하게 했고, 다른 그룹에게는 계속 고개를 좌우로 돌리는 거부적 제스처를 취하게 했다.

실험 결과 사설의 내용과 관계없이 머리를 끄덕였던 그룹은 사설의 주장을 수용하는 경향을 보인 데 비해, 고개를 좌우로 돌렸던 그룹은 사설의 주장을 거부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처럼 단순한 제스처만으로 동일한 주장에 대한 우리 감정과 행동에 차이가 발생하지만, 우리는 제스처 때문에 그런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자신의 행동을 바꾸고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자신이 무심코 내뱉는 말, 자주 접하는 글, 습관으로 굳어진 몸짓부터 유심히 살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조정자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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