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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 5천년전』의 성과|뚜렷한 한일문화의 맥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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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까미」교수는 동북「아시아」사의 세계적 권위자로 67년 동경대학을 은퇴,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그는 동북「아시아」사중 특히 고대「아시아」문화를 전공, 동양고고학분야에서도 『고대동북아시아사연구』 『페르샤의 도기』 『만선원시분묘연구』 등 아직까지 학설로 유력한 저서를 남기고 있다. 69세에도 불구, 아직도 왕성한 연구활동을 하고있는 「미까미」교수는 한국사에도 관심을 확대, 『발해의 압자와와 그 역사적 성격』 등 20여편의 논문을 발표, 한·중·일의 동양고대사를 체계화한 일본최고의 고대사 학자이다. <편집자주>

<특별기고>삼상차남(동양사·동경대 명예교수)
한국은 일본과 지리상으로도 제일 가깝고 역사상으로도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밀접한 지역이어서 그 나라의 역사나 문화는 일본인이 충분히 알고있지 않으면 안됨에도 막상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것은 일본인이 한국을 이해함에 있어서 아주 큰 결점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걱정을 해소시켜 주는 극히 뛰어난 전람회가 일본에서 열려 한국의 우수한 문화를 소개했다. 동경 경도 복강에서 열린 「한국미술 5천년전」이 곧 그것이다.
이 전람회에서는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한국의 대단히 뛰어난 미술공예가 수많이 일본인 앞에 전시되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이 있지만 많은 일본인은 이 미술품전람회를 보고 한국의 오랜 역사와 우수한 문화 및 한국과 그 주변 여러 나라, 특히 일본과의 관계 등에 대하여 명확한 인식과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인으로서 매우 기쁜 일이었다.
외국인으로서의 필자가 이 전람회를 보고 느낀 점 두 세 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 고대 한국문화의 기층에는 북방「아시아」문화(내륙「아시아」문화를 포함하는)적인 요소가 크게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치는 진열품에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신석기시대 토기의 주류를 이루는 빗살문(즐문) 토기라든가 혹은 청동기시대에 있어 독자적으로 발달한 다뉴세문경이나 방울 붙은 기구 혹은 수형대구와 단검을 비롯한 무기라든가-이것들과 다른 지역의 그것과 비교할 경우 북「아시아」·내륙「아시아」의 그것과의 근연성을 볼 수 있다.
중국에선 은대 이래 특색 있는 청동기문화가 발달해 있었으나 중국청동기문화가 한반도의 그것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기원전 2세기말이후 한반도 서북이 중국왕조에 의해 지배되는 잠시동안 이 지역에는 중국문화의 영향도 인정되긴 하지만-.
이런 점에서 보면 한반도의 원시고대의 기층문화는 북「아시아」문화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 상태는 삼국시대까지 유지됐다. 가령 삼국시대 지배자문화의 한 표식이었던 금관이나 금제귀고리 혹은 감옥금장단검(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14호분 출토)이나 유리기 등은 내륙「아시아」나 북「아시아」의 그것들과의 관계가 인정된다. 그러나 동시대 중국문화와의 관련은 없다. 순금을 많이 사용하는 관습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한반도의 미술공예에는 아직도 북「아시아」적 요소가 강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가 되면 동시에 중국 공예의 기술도 받아들였다. 삼국시대 유적에서 무수히 출토되는 경질토기는 간접적이긴 하지만 중국의 소성기술을 받아들여 생산된 것이다. 따라서 중국 미술공예와의 관계는 그 다음의 통일신라시대이후 차차 밀접의 도를 더해간다.
이 같은 통일신라시대이후 한 문화와 중국 문화와의 관계는 한층 깊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도 북「아시아」적 요소는 잠재적으로 살아 내려가지 않았는가.
이번 전람회가 이와 같은 상황을 미술공예품을 통해서 가르쳐준 것은 흥미 깊은 일이다.
둘째로 한국미술의 특성의 하나가 아니겠느냐고 느낀 점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번 전람회에서는 각 시기마다 제각기 특색 있는 공예미술품이 나왔지만 원시부터 조선왕조까지의 모든 시기를 통하여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은 도자기다.
따라서 도자기를 통해 한국공예미술의 특성을 통관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이제 원시시대이후 조선왕조까지의 도자기를 통람해 보면 그사이에 하나의 특질이 인정된다.
각 시기의 도자기 종별을 개관적으로 보면 비교적 단일한 편이어서 한시기에 여러 종류의 도자기가 공존하는 일은 적다. 즉 한 시기에는 한 종류의 도자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류를 이루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원시시대에는 빗살문 토기 혹은 유문토기가 주류를 이루어 다른 형식의 것은 종류·양면에서도 극히 적다. 또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는 주로 회색의 경질토기여서 다른 종류의 것은 극히 적다. 다음 고려시대에는 흑유자나 백자가 있지만 역시 근소하며 주체는 청자가 차지한다. 또 종류가 많다고 생각되는 조선왕조시대에도 백자·청화백자·분청사기 등이 중심이어서 한결같이 백 일색으로 기조를 삼았다.
이같이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시기마다 한 종류 또는 적은 수의 종류의 도자기가 주류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약간의 다른 종류의 도자기가 있다해도-한국 도자기의 한 특색인 듯이 생각된다. 이런 현상은 이웃나라인 중국이나 일본 혹은 멀리 「페르샤」나 「유럽」에서도 전혀 볼 수 없는 일이다.
한국도자기에 이런 현상이 보이는 요인으로서는 각 시대의 사회사정에도 까닭이 있겠으나 또 한가지 단일한 것을 즐기는 민족적 특질이 그러한 상황을 초래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점은 다른 미술공예의 「장르」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외국에서 보면 그렇게도 생각된다.
세째는 마찬가지로 도자기를 통해 관찰할 수 있는 외국. 특히 일본과의 관계다. 한국의 도자기 소성기술은 삼국시대이후 여러 시기마다 중국의 기술을 받아들여 그것을 한국에 알맞게 바꾸어 시기마다 독자적인 도자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리하여 한국에서 발달한 도자기 소성의 기술은 그 다음 일본에 전해졌다.
이것은 고대에 있어서 삼국시대의 경질도기와 일본의 수혜기를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5세기 중엽 일본의 초기 수혜기(초벌구이)를 보면 틀림없이 삼국시대 경질토기의 기술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근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조선왕조 중기의 백자·청화백자·철회자기(철사)의 소성기술은 일본에 전해져 이것으로 일본요업의 획기적 발달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아직 충분한 검토가 돼있지 않지만 고려청자의 기법도 실정시대(1392∼1573년=이조초기)의 일본요업에 무언가 영향을 주지 않았겠느냐 하고 나는 남몰래 생각하고 있다.
이번 전람회를 통해서 느낀 바는 이것만이 아니라 훨씬 더 많으나 지면관계상 여기서 그치겠다.
한마디로 한국미술5천년전은 일본국민에게 많은 새로운 지식을 주었고 또 한국미술의 우수함을 인식케 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이것은 양국의 상호이해에 무엇보다도 기쁜 성과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와 같은 뜻 있는 전람회가 열리도록 노력한 한국의 당사자들에게 새삼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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