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출판] '가네코 후미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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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야마다 쇼지 지음, 정선태 옮김/산처럼, 1만8천원

"태어날 때부터 나는 불행했다. 요코하마에서, 야마나시에서, 조선에서, 그리고 하마마쓰에서 나는 시종일관 가혹한 취급을 받았다. 나는 자아라는 것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지나온 모든 날들에 감사한다. 운명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았기에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벌써 열일곱 살이다." 가네코 후미코의 '자서전'에서-.

무책임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무적자(無籍者)로 태어난 가네코. 가혹한 운명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열일곱 어린 나이에 자아를 발견한 그녀는 그로부터 6년 후인 23세 때 일본 우쓰노미야 형무소의 여죄수 독방에서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불과 4개월 전에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된 그녀의 돌연한 죽음은 당연히 '의혹'으로 번졌다.

화장된 그녀의 유골은 도쿄에 있던 육홍균.장삼중 등 비밀단체 '불령사'의 한인 회원들에 의해 비밀리에 빼돌려져 현해탄 건너 경북 문경에 안치됐다. 옥중에서 의문사한 일본 여인의 유골이 한반도 남단에 묻힌 이유는 그녀가 유명한 한인 아나키스트 박열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유골로 돌아온 조선땅이 그녀에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는 10세 때인 1912년부터 할머니와 고모가 살던 충북 청원군 부용면에서 1919년까지 살았다. 저녁을 굶고 쫓겨난 어느 날 그녀는 "보리밥이라도 괜찮다면 주겠다"는 조선 아낙의 호의를 받고 "조선에 머물렀던 7년 동안 나는 이때만큼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에 감동한 적이 없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박열이 '청년조선'에 기고한 '개새끼'란 시에서 "어떤 강렬한 감동이 나의 전 생명을 고양하고 있었다"고 느꼈던 그녀는 1922년 봄 박열을 만나 동거에 들어갔다. '동지로서 함께 살 것' 등을 서약한 둘은 아나키스트 조직 흑도회의 기관지 '흑도(黑濤)' 등을 발간하며 제국주의의 심장부 도쿄에서 사랑과 혁명을 꿈꾸었다.

23년 9월 1일 유명한 간도(關東)대지진 발생 이틀 만에 둘은 예비 검속돼 '천황폭살사건'이라는 대역사건의 주범으로 부풀려진다. 대지진의 공황심리를 엉뚱한 곳으로 분출시키기 위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켜 6천여명의 조선인을 '사냥(?)'한 일제는 박열을 천황 폭살을 꾀한 대역죄인으로 만들어 위기를 돌파하려 했던 것이다.

박열과 가네코가 아나키스트였던 점이 이용됐다. 일본의 저명한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行德秋水)와 오스키 사가에(大杉榮)가 모두 처형.살해됐을 정도로 아나키즘은 일본에서 천황제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한 여성 아나키스트의 짧은 일생을 다루면서도 그녀를 통해 일본 천황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박열과 가네코는 법정을 투쟁의 장으로 삼아 천황제와 맞서 싸움으로써 일본과 조선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예심판사는 박열과 가네코를 격리시키기 위해 가네코에게 일곱 차례나 전향을 권유했으나 가네코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형벌이 사형 하나밖에 없는 형법 제73조 대역죄를 감수했다.

사형수 가네코는 "만약 죽음이 저 남자의 생명을 요구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를 대신하겠다"라는 서한을 남기기도 했는데, 일본 최고재판소가 종군위안부의 배상 거부를 결정한 오늘날 가네코의 삶은 일본 제국주의는 과연 극복됐는지를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덕일(역사평론가)

<사진 설명>
1925년 박열과 가네코가 일본 천황과 황태자에 대한 폭탄 투척 혐의로 수감됐을 때 취조실에서 찍은 사진. 당시 야당이 옥중에서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지 문제를 제기해 정치쟁점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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