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흑인들의 꿈 어디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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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버지는 변호사, 어머니는 대학의 영문학 교수.
본인은「브라운」대학교와「하버드」법과대학 출신의「워싱턴」의 거물 변호사. 이런 이력서의 주인공이 누군가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력의 심장부를 드나들면서 벌써 백만장자가 되어있는 이 나라 상류사회의「귀족」을 연상한다.

<소외감의 위기 느끼기도>
그러나 여기 소개된 이력서의 주인공은 피부 빛깔이 검다는 이유 하나로 지금까지 쌓아올린 출세의 탑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랠프·커닝엄」은 고향「어틀랜터」를 떠나「뉴잉글랜드」에서 공부하는 동안 남부의 특유한 억양까지 잊어버렸다.
『검은 것은 아름답다』는 구호와「아프리카」식「헤어·스타일」이 유행할 때에도 그는 둔감했다.
「커닝엄」은 백인동료들보다 몇 갑절의 노력을 하여 미국에서는 최고의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워싱턴」의 초일류 변호사』의 대열에 드는데서 보람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72년 초부터 신경쇠약에 걸렸다. 흑인사회와 등지고 산다는 죄책감이 불시에 다가든 것이다. 백인사회에서 불편 없이 살고 있다고 자부하던 그는 자기가 흑인사회와 백인사회의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고 있다는 소외감의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커님엄」의 위기는 소위 흑인「부르좌지」가 지도하는 민권운동이 당면한 문제의 축소판이다.
「마틴·루터·킹」을 포함한 흑인 지도자들이 이끈 민권운동은 흑인들의 중산층화였다. 그들의 운동은 성공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중산층」이라는 표현은 흑인 대다수에게도 통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흑인가구의 소득은 99.6%나 늘고(백인은 69%) 빈민권의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1959년의 48%에서 1972년의 29%로 떨어졌다(백인은7%).
그러나 민권의 법적 보장이 인권의 실질적인 보장을 동반하지는 않았다.
1965년「마틴·루터·킹」이「몽고메리」까지의 민권 행진을 시작한「셀머」에서조차 유명한「피의 일요일」에「에드먼드·피터스」교에서 수많은 흑인들이 흘린 피가 아직 완전히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있다.

<「실질적 인권보장」요원>
「셀머」의「컨트리·클럽」에는 아직 한 사람도 흑인은 가입되지 않았다. 고급식당「틀리호」는 회원제란 구실로 흑인의 출입을 금지한다. 젊은 백인주부「파멜러·힌즈」가 일하는 백화점의 일부 동료들은 아직까지도 흑인과 악수를 하고 나서는 화장실로 가서 손을 씻는다.
이 고장 사업가들이 점심을 겸한 회합을 가질 때 백인기자가 아니면 취재가 거부되고「타임스·저널」의 편집자는 그런 모순을 감수하고만 있다. 「시민은행」을 소유하고 있는「마덜랜드」의 집에서 베푼 만찬에는「셀머」의 유지라는 사람들은 모두 모였지만 검은 얼굴이라고는「우간다」출생의 인도 청년으로「타임스·저널」발행인의 누이동생과 결혼한 세무사 한 사람 뿐이었다.

<혁명적 정열 잃은 블랙파워>
흑인 전용 사교장「엘크스·클럽」에서 만난 어떤 흑인 지도자는『흑인과 백인은 영원한「테제」인가』라며 검은 이마에 주름살을 그렸다.
젊고 과격한 흑인 민권 지도자였던「스토클리·카마이클」은 흑인들에게 중산층의 가치관을 설교한 것은 흑인문화와의 단절을 촉구한 것이라고「마틴·루터·킹」을 비판했다. 「카마이클」은 백인 중산층의 가치관은 소수파 인종을 향한 인간성의 확대보다는 물질적인 번영에만 바탕을 둔 문화적 흡수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들은 공개 사회보다는 폐쇄사회를 찾아서 교외로 도피하고 자유경쟁의 철학을 신봉하면서도 흑인들에게는 그런 경쟁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지미·카터」의「인종적인 순수성」발언, 북부로 옮아간 강제통학을 둘러싼 인종분쟁, 「리건」의 인기, 「포드」의 우경화 같은 현상은「카마이클」의 경고대로 흑백의 법적인 통합을 바탕으로 하는 흑인의 중산층화가 결코 흑인운동의 종착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흑인운동이 민권운동에서「휴머니즘」의 운동으로 도약하려는 시기에 혹인 지도자들은 현실에 안주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혹인「엘리트」와 대중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간격이「커닝엄」의 신경쇠약으로 나타난다. 흑인대중의 중산층 편입으로 도심지의 흑인인구가 줄고 많은 흑인들이 가로수 우거진 안락한 교외로 밀려나가자 백인 중산층의 새로운 반발이 일고 있다.
흑인운동은 민권운동에서 인간운동으로 옮아가는 변증법적인 발전을 위한 결단의 순간에 당도한 것 같은데 문제는 젊은「블랙·파워」가 이미 혁명적인 정열을 잃은 흑인「부르좌지」가 형성하고 있는 진공지대를 어떻게 뛰어 넘느냐에 달려있다. 「포드」가「켄터키」예비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인종차별 폐지를 위한 흑백 강제통학에 반대하는 연설을 한 것은 젊은 혹인 지도자들에게는 심각한 도전이라고 하겠다. 【셀머(미앨러배마주)=김영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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