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을 경제우등생으로 이끈 연방은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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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인플레」에 대해 가장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서독에서 통화가치안정의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는 곳이 바로 서독 중앙은행인 연방 은행이다. 통화 가치를 사수하기 위해선 옥쇄도 불사한다는 사명감과 각오이다. 서독이 전쟁의 잿더미에서 오늘날 우등생으로 부상한데는 시류나 정치에 타협하지 않고 통화정책 우선을 외골수로 고집해온 연방은행의 공이 컸다.
연방은행은 수도인「본」에 있지 않고 금융중심지인「프랑크푸르트」에 있다. 은행의 은행으로서 은행이 모여 있는「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본」에 있는 재무성과는 거리도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금융정책의 수립, 집행에 있어선 거의 완전독립에 가깝다.
연방은행은 흔히 변하기 쉬운 성장에의 경사와 유혹을 결사적으로 뿌리치고 마치「오토반」(고속도로)을 건설하듯이 안정기반을 닦아왔다. 서독의「오토반」은 초과달성의 졸속이 없는 대신 한번 완성하면 반영구적이다. 서독의 물가안정도 마찬가지. 무리한 욕심을 내지 않지만 중도에서 중단하지도 않는다.
『74년「오일·쇼크」때 선진제국이 모두 20%가까운「인플레」에 휘말렸는데 서독만이 연7%선의 물가안정을 유지한 비결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비결? 경제에 비결이 어디 있느냐? 경제의 비결을 찾고 쾌도난마식의 개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바로 비결』이라고 연방은의 대변인은 찾아간 기자에게 잘라 말한다. 흔히 개발도상국에선 경제를 시험관속에서 화학실험 하듯이 벌컥 뒤집어 놓지만 그런다고 하루아침에 체질개혁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덧붙인다.
물가안정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고통스럽지만 꾸준히 용기를 갖고 기반을 닦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2차 대전 후 실업자가 넘쳐흐르고 모든 국민들이 빵에 굶주릴 때부터 절박한 확대팽창의 유혹을 뿌리치고 통화가치 안정에 정책의 우선 순위를 두어 이를 인내성 있게 추진해온 것이 오늘날 서독경제의 우등체질의 피와 살이 됐다는 것이다.
사실 서독은 무슨 일이 있어도 통화증가율을 연10%선으로 억제해왔다. 서독의 물가안정엔 노사협조, 독점적 횡포의 강력한 단속, 임금인상의 자제 등도 큰 기여를 했지만 무엇보다도 통화의 범람을 막기 위해 연방은행이 억척스럽게 고집하고 싸우고 저항한 공이 가장 컸다는 것이다.
『생산과 수출을 늘리고 실업을 줄이려면 너무 통화안정만 고집할 수 없지 않느냐?』는 물음에『수출증대와 실업해소를 통화확대로 달성하려는 생각이 가장 위험하다. 물가안정이 안되면 모래 위의 집과 같다. 물가안정이 이룩되면 수출 경쟁력이 생겨 수출은 저절로 늘어나고 생산확대와 실업문제도 자연 해결된다. 서독이 석유파동의 와중에서도 국제수지의 흑자를 이룩하고「마르크」화가 계속 강세인 것은 통화의 안정이 가장 밑받침이 됐다』고 대변인은 소신 있게 설명한다.
물론 독 연방은행이 통화안정을 고수하는덴 압력도 많이 받는다. 정부나 기업 쪽은 아무래도 빠듯한 안정보다 풍성한 성장에 경사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방은행법엔『연방은행은 정부의 정책기조의 범위 안에서 통화가치 안정을 위한 금융정책의 수립이나 집행은 완전 독립하여 행한다』고 못박아놓고 있다.
서독은 양차 대전 후의 천문학적「인플레」에 심한 고통을 당한 뼈저린 경험이 있기 때문에 물가안정의 당위성에 대해선 범국민적인「컨센서스」가 되어있다. 때문에 정부도 무리한 요구는 절대로 않고 또 통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연방은행은 통화가치안정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면 아무리 정부의 요구라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통화규모·이자·지준 등은 모두 연방은행에서 독자적으로 결정한다. 연방은행의 정책결정 회의에 정부에서 참석하여 정부의 입장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의결권은 없다. 오히려 연방은행에서 여러 경제정책에 대해 수시로 건의를 하고 정부는 이를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중앙은행이 아무리 통화조절을 하고 싶어도 정부재정에서 적자를 내면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한국적 질문에 대해『정부에서 아무리 재정적자를 크게 내도 우리와는 상관없다. 연방은행은 미리 정해놓은「라인」이상으로 정부에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간단히 대답한다. 즉 서독에선 재정적자가 나면 무조건 중앙은행에서 돈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금융시장에서 국채를 일반 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재정적자를 발권력으로 모두 메워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앙은행은 독자적으로 통화를 조절, 유지해갈 수 있는 것이다.
『정부의 요청을 거부해도 총재의 목이 괜찮은가?』
『총재의 임기는 8년으로 법에 정해져 있고 스스로의 의사에 반하여 결코 그만두지 않게 되어있다. 당신네 한국에선 정부에서 중앙은행 총재를 감히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가?』하고 의아스럽게 묻는다.
서독 연방은행의 총재를 비롯한 간부의 임기는 법이 정한대로 완전히 보장되어 있어 정권이 바뀌어도 끄떡없다. 또 정부가 중앙은행의 인정에 관여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또 연방은행 자신도 정부의 간섭을 자초할 만큼 흐리멍텅하지도, 무기력하지도 않다. 서독연방은행이 통화가치안정의 수문장을 자임하는 긍지와 각오는 완전히 체질화되어 있는 것 같다. 또 정부나 국민들도 이에 충분한 신인을 주고 있다. 70년부터 75년까지 서독의 연평균 물가상승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6.1%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서독 연방은행의 통화가치 안정노력이 어느 정도 성공했는가를 단적으로 웅변해준다. 【프랑크푸르트=최우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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