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어린이와 함께 50년 윤석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우리나라에도 널리 퍼졌던 일본 서조팔십의「동경행진곡」에 나오는, 『옛날이 그리운 긴자(긴좌)의 버들』에 큰 기대를 걸고「긴자」거리를 거닐어 보니 먼지가 켸켸 앉은 초라한 버들이었다. 우리나라「천안삼거리 능수버들」도 가까이 가보면 추례한 버들인 것처럼.
흠만 눈에 띄던 친구들도 일본 동경쯤 앉아서 생각하니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1년 가까이 보낸 그 고장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서울 사는 한 여인의 아리따온 마음씨였다. 그는 진남포 태생으로 동경 잠사(잠사) 학교를 나온 뒤 대구에 취직해 있다가 종거장에서 우연히 만난 황신덕(추계학원이사장·임형빈중앙여고교장어머님) 소개로 개벽사 여기자가 된 소저 김원주(월북·사망)였는데, 아버님이 딴 살림을 차리자 어머님을 모시고 상경하여 장교동에서 모녀가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를 알게 된 것은 여름에 서울을 잠깐 다니러와 개벽사를 드나들 때였는데 멋대가리 없는「뚱한 여성」으로 동료 간에 따돌림을 받았으나, 사귀어보니 무던하고 싹싹하기 이를데 없었다. 나보다 세 살이 위 였는데 평오 여고시절「테니스」선수였다. 가을에 다시 일본으로 간 나에게 성공을 비는 기나긴 편지를 거듭 써 보낸 그였다.
『내가 처녀만 아니었더라면…』무슨 벌이를 해서든지 내 뒤를 대겠다고 노상 그러더라는 것을 나중에 그의 어머니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실현도 안됐고, 실현 시켜서도 안될 노릇이었지만, 그「고마운 마음씨」는 아직도 내마음속에 살아남은 것이다.
그의 자취방에서 또 하나 발견한 사실은 그와 동경 잠사학교 기숙사에서 여러해를 같이 지낸 동기동창 배여인을 만났는데, 어느 음악가 이야기가 나오자 파르르 떨면서『그는 악마…』라고 하면서 악담을 퍼 붓는게 아닌가.
왜 저럴까? 이상한 일도 많다 했더니, 그 유부남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버림을 받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가 돌아간 뒤 내 이야기를 듣고 그러한 사실을 비로소 알았노라고 혀들을 찼었다 (그는 그뒤 정신분열을 일으켰다고 한다).
김을 통한 여성인줄 안 뭇 남성이나, 배를 순결한 여성으로 안 동창생들이나 잘못 알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무섭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복을 벗어 던지고 사회인이 된 나에게 길 건너 동네 춘원은 이런 부탁을 하였다.
비범잡·기노잡· 여자잡.
이 삼난을 극복해야 성공하리라는 것이었다. 잘난체 말고, 이것 저것 덥적거리지 말고, 달갑게 구는 여자를 조심하라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자기 체험에서 난 삼잡인 듯 싶었다.
역시 여자 (통틀어 사람이 그렇겠지만)는 멀리 떼 놓고 보아야 아름다운 모양이었다. 가까이 보면 물감칠로 밖에 안 보이는 그림 모양으로.
그런 생각을 품은 나에게 하루는『승방비곡』의 작자 독견 최상덕이 여자 후리는 법을 가르쳐 주는게 아닌가. 그의 신 연재소설에는 이런 대목도 있었다.
『여자란 불만 끄면 다 마찬가지다. 여하튼 1년 가까이 걸려서 일본 동경에서 터득한 것은 사람이든, 자연이든「멀리서 바라볼수록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이 한가지를 깨치려고 밥을 굶어가며 객지에서 고생을 한 셈이다.』
「멀리 두고 생각하는」사랑의 시인에 금아 피천득이 있었다. 해마다 상해 호강(호강)대학이 방학에 들어가면 귀국해서 춘원댁에서 지냈다.
어느 방학엔 식사는 길 건너 우리 집에서 하고, 묵기만 그 집에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상해에서 미지의 한 여류시인(노천명이었다)에게 하루 한 편씩 영시를 우리말로 옮겨 꼬박꼬박 부치며 그를 그리워했다. 그런데 뒷날 여 시인 말을 들으니 (그는 나하고 조선중앙일보와 조선일보학예부에서 오래 같이 일한 흉허물없는 사이였다) 한동안 진주 언니네 집에 내려가서 묵었는데 그 명 역시를 처음 몇 편만 받아보고는 끊겨 버려 여간 아쉽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랑채 변호사 사무실(형부 최두환이 변호사였다)에서 일일이 뜯어보고오는 족족 몰서를 해버린 것이었다. 『그 명역을 생각할수록 아깝다』는 것은 피천득과 노천명이 각각 나더러 한말이었으나 직접은 그런 말을 주고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에게서도 역시『사랑이란 멀수록 가까운 것』임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