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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에 떠난 얼음판의 전설, 이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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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스피드스케이팅의 전설 이규혁이 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은퇴식을 했다. 박승희와 이상화(왼쪽부터) 등 후배들도 함께했다. 이규혁이 선수생활을 정리한 동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김성룡 기자]
이규혁은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왼쪽)에 대해 “지원을 받지 못해 우리나라 선수로 올림픽에 나서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사진 브리온 컴퍼니]

스피드 스케이팅의 전설 이규혁(36)이 7일 공식 은퇴했다. 만 4세 때 빙상 대표 출신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처음 스케이트화를 신은 지 32년 만이다. 은퇴식을 통해 자서전 『나는 아직도 금메달을 꿈꾼다』(토트) 출간 소식도 함께 알렸다. 은퇴를 앞두고 올림픽 전부터 준비했던 자서전에는 그의 생생한 경험과 빙상계를 향한 애정의 쓴소리가 담겨 있다.

 소치 겨울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1000m는 그의 마지막 레이스였다. ‘경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카톡’ 메시지가 300개 넘게 와 있었다. 지인들뿐만 아니라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들도 메달과 상관없이 나를 응원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 순간 가슴에서 뭔가 울컥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게 바로 나의 금메달이 아닌가! 미친 듯이 달렸고, 메달을 못 땄지만 그 노력과 마음을 알고 박수를 보내준 분들이 있으니 내게는 이게 바로 금메달이다.’

 이규혁은 15세에 성인 국가대표가 됐다. 이듬해인 1994년에는 릴레함메르 올림픽에 출전했다. 소치까지 여섯 번이나 올림픽에 나갔지만 개회식 참석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구나 그는 한국 선수단 기수였다. ‘대기 순번이 가까워지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태극기가 일단 너무 무거웠다. 실제 무게에 마음의 무게까지 더해져 폼나게 흔드는 건 역부족이었다.(중략) 어느 순간 관중석에서 태극기가 흔들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막상 그렇게 마주하고 보니 가슴 한쪽이 뭉클했다.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동계올림픽의 열기, 조금씩 흥분이 고조되는 축제의 밤이 내가 마지막 올림픽에 와 있음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첫 올림픽이었던 릴레함메르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레이스를 펼칠 때는 관중의 함성에 어깨가 눌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난 뒤 편안한 마음으로 관중석에 앉아 경기를 관람했을 때는 잘 연출되고 편집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그때 ‘아, 1등을 한 사람이 주인공이구나! 나도 올림픽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간절함이 새겨졌다.’

 힘든 순간이 많았어도 그는 ‘스케이트장에만 들어서면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때는 2010 밴쿠버 올림픽이었다.

 그는 ‘노 메달의 영웅은 내게 너무나 가혹하고 치명적인 굴레였다. 올림픽 최다 출전이라는 기록도 내게 자랑은 아니었다’며 괴로워했다. 그는 지인의 권유로 골프를 했고 ‘집중력이 좋아지며 복잡하던 생각이 조금씩 정리됐다’며 다시 뛰었다. 소치 올림픽 출전은 그의 커다란 자랑이 됐다.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올림픽 6회 연속 출전과 메달을 결코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규혁은 빙상계 파벌에 관해 일침을 가했다. ‘빙상연맹과 내가 마찰을 빚으면서 부모님도 수모를 겪었다. 지금 연맹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부모님에게는 까마득한 후배들이다. 나랑 사이가 안 좋다고 해서 우리 부모님을 너무 막 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너무 죄송했다. 줄서기 잘못하면 언제든 찬밥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표본을 보여준 것 같아 후배들 볼 면목도 없다. 나랑 같은 대학을 나와야 내 후배고, 내가 교수로 있는 대학을 나와야 내 제자라는 식의 이상한 파벌을 나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러시아로 귀화해 소치 올림픽 쇼트트랙 3관왕에 오른 안현수(29·빅토르 안)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우리나라 선수로 올림픽에 못 나간 건 선발전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 2006년 토리노 올림픽 이후 현수는 지원을 못 받았다. 지원을 해주면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선수를 내쫓은 꼴이 됐다.’

 이규혁은 지도자를 꿈꾼다. 은퇴식에서 그는 “국가대표를 오래 했기 때문에 지금 이 느낌이 살아있을 때 후배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걸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후배들이 평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여러 면에서 돕고 싶다”고 말했다.

 자서전 마지막에 언급된 글처럼 이규혁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는 꿈, 지치지 않는 도전, 그것이 이규혁이다. 나는 아직도 금메달을 꿈꾼다.’

글=김지한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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