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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일 외교문서가 밝힌 「종전 30년」…그 내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일본외무성은 5월31일부터 동경마포태외교사료관에 비장되어 있던 전후 외교문서 중 종전부터 1952년4월28일 「샌프런시스코」강화조약발효까지의 일본정부와 연합군점령군과의 협상과정을 기록한 1백99권(약10만「페이지」)의 내용을 공개했다. 중앙일보는 이 자료를 긴급 입수 한국관계 부분을 포함한 종전 전후의 중요부분을 발췌 소개한다.
이번 외교문서의 공개는 30년이 경과한 외교문서는 전부 공개한다는 일본정부의 방침에 따른 것인데 이중 일본의 『국가이익에 관련된 것』과 황실의 「프라이버시」에 관한 것은 제외되었다.
이 외교기록 속에는 「샌프런시스코」강화조약이 체결된 1952년까지 연합군최고사령부(GHQ)와 일본정부사이에 교환된 서한들도 포함돼 있으며 전쟁을 포기하고 재무장을 금지한 일본신헌법이 기초되기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문서들은 외무성의 외교기록실에서 읽힐 수 있도록 52개의 「마이크로필름」에 모두 복사되었다. 이 문서들 속에는 GHQ가 일본정부에 「도오죠·히데끼」(동조영기) 「야마시다·도모육끼」(산하봉문) 및 기타 전범들의 처형을 알리는 공한·교육제도개편·토지개혁·전범용의자들의 체포·경찰무장·공창폐지 등과 관련, GHQ가 일부정부에 내린 명령 및 지시도 들어있다.
일본점령시대의 외교문서 중에는 한국전쟁에 재일 한국인이 의용군으로 참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국전쟁에 재일 한국인이 의용군으로 참전한 것은 동경주재한국 대표부의 요청에 대한 GHQ의 승인으로 가능했다는 것이 기록돼있다.
1950년7월6일자로 GHQ가 일본외무성에 보낸 연락문서에 의하면 6·25동란이 발생한지 5일 후인 6월30일 동경주재한국대표부의 김용식 공사가 GHQ로 「웰로비」참모부제2부장을 방문, 의용군모집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웰로비」소장은 즉석에서 찬성하고 『즉시 시작해야 한다. 특히 기술자에 중점을 두었으면 한다』고 답변하고 더욱이 북한계 분자들이 끼지 않도록 신원조사를 엄중히 하도록 주의까지 환기시켰다.
일련의 외교문서는 8월과 9월 의용군이 출발한 사실을 명기하고있으나 몇 명이 출전했는지는 정확한 숫자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1951년7월10일자 문서에 따르면 당시 한국에 있는 의용군의 수를 동경주재 한국대표부는 1백26명으로 통보했다는 것이다.
또 외교문서에는 2차 대전 중 일본국내에서 노동력이 부족하여 약4만 명의 중국인이 계약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연행되어 광산·토목건설장 등에서 강제 취업하다가 약6천8백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인보다 훨씬 많이 한국인이 강제 연행되었으나 이에 관해서는 GHQ에 보고도 정확히 되어있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다.
연합총사령부와 「마닐라」사령부와의 오고 간 수많은 전보를 보면 종전직후의 혼란상태를 엿볼 수 있다. 8월15일 「히로히또」(유인) 일본천황의 항복발표에 따라 각 전선의 지휘관에게 16일 정전명령이 내려졌다.
이 같은 명령은 통신으로 전달됐으나 만주의 중국동북지구전선에 진입한 소련군은 공격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또 천도의 최북단 「시무쉬르」(점수도)에는 18일 새벽 소련군이 상륙해서 종전과는 아랑곳없이 새로운 전투가 시작됐다.
소련군은 22일에 점수도를 점령했고 이보다 앞서 20일에는 심양·장춘을 점령, 22일 후에야 전투가 거의 끝났다.
북해도 연안에서 일본선박 4척이 22일 소련해군소속으로 추정되는 잠수합의 어뢰공격을 받아 3척이 침몰,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때에는 1백t이상의 일본선박의 항해금지명령이 내려졌는데 그 시각은 24일 하오 6시부터였다.
항복문서조인에 관한 자료를 보면 「맥아더」사령부는 16일 일본천황·정부·대본영에 전투정지의 명령하달, 『항복문서 작성을 위한 대표단의 「마닐라」파견』을 요구했다.
「맥아더」사령부의 요구에 따라 천황의 신임장을 가지고 「마닐라」에 간 것은 횡산일랑 전 해군소장과 하변호사낭 육군중장이었다.
대표단은 비행기 2대에 분승했는데 일본군 특공기의 기습이 있으리라는 정보가 있어서 비행 「코스」도 비밀에 붙여졌다. 「마닐라」에 도착한 8월19일 밤 대표단은 일본 육해군의 배치상황 등 군사정세를 보고, 다음날 20일에는 미국 측으로부터 항복조건의 제시가 있었다.
이 때 일본측에는 질문은 인정되었지만 의견을 밝히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소위 회담은 아니었다.
천황포고안·항복문서·육해군일반명령 제1호 등 3가지 문서를 각각 3통씩 수령한 대표단은 다시 2대의 비행기에 분승, 21일 동경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는 내각법제국을 중심으로 문진을 다듬기 시작했으나 일본과 미국과의 제도와 관습이 달라 손질하는 것이 필요했다.
특히 어려웠던 것은 미국측 천황포고 초안에는 영어로 평민에 사용하는 1인칭 「I」와「MY」로 표현되어 있어 짐을 영역한 「WE」와 「OUR」로 고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동경=김경철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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