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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선언 이후 동구는 변하고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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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구의 몇몇 공산국가들은 조심스럽게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자노선을 모색하고 있다. 소련의 「탱크」가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과 「헝가리」 「체코」사태를 기억한다면 그러한 독자노선이 비록 제한적이라고는 하나 놀랄만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동구에 대한 소련의 지배를 용인하는 미국의 대 동구정책이 말썽을 빚고 있을 때 미국의 「뉴스·데이」지는 동구의 변화를 특별취재 했다. 다음은 「윌리엄·애트우드」와 「윌리엄·섹스턴」 두 전문가가 쓴 동구부분을 간추린 것이다. <편집자주>
오늘날의 동독을 상징하는 것은 동서「베를린」을 가르는 장벽이다. 서독의 진출을 막고 동독을 움츠러들게 하는 이 벽은 「데탕트」정책이나 「헬싱키」선언 이후에도 여전히 그대로 버티고 있다.
그 벽 뒤의 동독 인들은 동구권에서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고있다. 그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때문이 아니라 전통적인 독일인의 근면성과 현대적인 산업 때문이다.
4월의 첫 일요일 「베를린」 교외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차를 몰고 공원이나 숲을 찾아들고 있었다.
「할리우드」에서 직수입된 영화 『돌고래의 날』에 군중들이 몰리고 국립「오페라·하우스」에는 긴「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브람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건 「모스크바」식의 소란스러움은 보이지 않았다.
동「베를린」에서 「폴란드」 국경근처의 「아이젠휘텐스타트」를 여행하면서 동독이 얼마나 서독의 산업력을 따라잡으려고 하고있으며 2등 국민의 신세를 면하려 하고 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아이젠휘텐스타트」는 1950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나 황무지를 일구어 만든 이 도시는 동독 철강공업의 중심지로 인구 6만 명의 산업도시가 되어있었다.
나의 기억에 또 하나 남아 있는 것은 텅 빈 광장에서 농구를 하는 11세 또래의 세 어린이였다. 이 광장에는 1백「피트」도 넘는 붉은 돌로 만든 「레닌」상이 광장을 지배하듯 서있었지만 이 소년들에게 「레닌」상은 아무런 「이데올로기」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세 어린이는 이 「레닌」상을 농구의 「백·보드」로 사용하고 있었고 아무도 그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20년 전 미국이 수수방관하고 소련 「탱크」가 공산주의자를 정권에 복귀시켰던 1956년의 「헝가리」사건은 충격적이었다. 동구에 대한소련의 지배를 미국이 20년 전에 묵인했듯이 오늘날 소련의 동구지배를 양해한다는 미국정책을 둘러싸고 「리건」 「키신저」 「포드」사이의 논쟁을 실은 신문을 나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사보았다.
이 신문은 매일 하오 4시 「파리」에서 「부다페스트」로 날라 온다.
장발과 「블루진」은 젊은이의 상징이었다. 「다뉴브」강의 양쪽 언덕에는 상품들이 가득 찬 상점이 잇대어 있고 팔을 낀 젊은 남녀가 거니는가 하면 봄을 찬미하듯 「로크」음악이 「트랜지스터·라디오」를 타고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헝가리」의 농업생산에 대한 「브리핑」을 듣는 자리에서 농업차관 「요젱·해머」에게 장발과 「블루·진」는 공산주의적 가치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해머」차관은 웃으며 그의 아들의 사진을 보여줬다. 아들의 머리카락도 어깨에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해머」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문제를 해결하는 이론이지 법칙은 아니라고 말했다. 『애비의 할 일이 무엇이겠소.』 「해머」는 이렇게 덧붙였다. 『자식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니겠소.』 확실히 「헝가리」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나 중공의 공산주의자들과는 다른 것에 우선권을 두고 있었다. 소련과 그 위성국들간의 이념적 관계는 경제적 관계로 대체되고 있다.
그래서 비록 정치적인 문제에서는 아닐지라도 경제적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장차 소련과 분쟁이 일어날 씨앗은 배태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인 독립은 미국인들이 기대하듯 가까운 장래에·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헝가리」는 사실 수세기 동안 소련의 「포로」였다. 그러나 「헝가리」인의 자부심을 엿보인 한 여자 안내인의 말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뉴브」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평화』라는 이름의 조각이 서있었다. 그녀는 그 기념비를 돌아보며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동구공산국가마다 소련의 전승기념비가 서 있지요.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의 전승 비랍니다』
이러한 경향은 「루마니아」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루마니아」의 한 잡지 편집인은 「불가리아」에 대한 사랑은 소련에 대한사랑과 같다』는 「불가리아」 공산당서기장 「지비코프」의 연설문이 실린 공산당기관지 「신테이아」를 가리키며 화를 냈다.
그따위 「이동 애국심」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며 소련군의 하나가 되고싶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50년대의 쓸쓸했던 「부카레스트」시를 방문했었던 나에게 이 도시 또한 놀라움을 주었다.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인터컨티넨틀·호텔」의 「스낵·바」에는 「치르버거」가 나오고 신문판매대에는 서구의 신문들이 팔리고 오늘의 「칼라」TV 「프로」로 「빠삐욘」이 영어로 선전되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내가 만난 외무성 관리들·편집인·외교관·교수들의 솔직한 태도였다. 그들은 뜻밖에도 군축·무역·「에너지」개발도상국문제에 정신을 쏟고 있었으며 그 문제를 아주 실제적인 방식으로 토론했다.
「루마니아」는 56년의 「헝가리」나 68년의 「체코」와는 달리 소련의 지배권에 지나치게 도전하지는 않고 있다. 「루마니아」인들은 「데탕트」가 l단계이고 「헬싱키」회담은 하나의 중요한 전주곡이라고 여기고 있다. 60년대의 어려운 시기에 민족주의를 유지해왔음을 상기시키면서 「신테이아」의 한 편집인은 이렇게 말했다. 『「헬싱키」 회담에 실망하지 말자. 그것을 전주곡이라고 생각하고 얼어붙은 냉전의 틀을 깨는 첫 걸음 이라고 생각하자.』 【W·P뉴스·서비스=본사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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