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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공무원의 보호책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건전한 고발 정신은 민주사회에 없어선 안될 덕목이지만, 그것이 비뚤어지게 행사되면 사회에 큰 해독이 된다. 고발정신이란 원래 사회에서 불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불의 추방 의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 나라는 절대 왕권이 군림하던 시절에도 선비들에 의해 이 건전한 고발 정신이 고취되어온 전통을 지니고있다.
죽음을 각오한 직언 충간의 상소가 그치기 않았던 전통이 바로 그것이다. 사관한 선비뿐 아니라 포의에게까지 허용된 이 상소는 국정의 비위와 무능을 고발하고 서정을 혁파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제도를 활용한 사람들이 사원이나 사욕에서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를 정화하겠다는 투철한 책임감과 용기를 가졌을 때 이 제도는 사회에서 온갖 불의를 몰아내는 막중한 기능을 다했다. 그러나 책임감이 결여된 사람에 의해 사리와 당략의 도구로 이 제도가 이용될 때에는 한낱 음해와 모함의 수단으로 타락했다.
오늘의 민주사회에서도 건전한 고발정신은 시민이 갖춰야 할 덕목임에 틀림없다. 불의를 용서하지 않으며, 남의 피해를 무관심하게 지나치지 않으며, 자기의 정당한 권리를 귀찮다고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다. 다만 불의를 추방하겠다는 왕성한 책임감과 용기, 그리고 법의 지배에 대한 신뢰 등 시민 정신이 결여될 때 결코 건전한 고발정신이 될 수는 없다.
사원이나 풀기 위해 남의 작은 비행을 들춘다든가, 자신은 법과 규범을 벗어나면서 남에게만 이를 강요하는 등의 행위는 시민정신의 타락이다. 더구나 허위사실을 날조하여 남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음해·모함에 이르러선 시민 정신의 타락을 넘는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행위는 불의의 추방이란 고발정신의 참뜻을 짓밟을 뿐더러 오히려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할 불의요. 사회악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그런 뜻에서 박 대통령이 서정쇄신과 관련, 무기명 또는 가명으로 된 투서를 관계 수사기관에서 일체 접수·취급하지 말도록 지시한 것은 적절한 조치라 하겠다.
우리 주변에선 서정쇄신과 사회부조리 제거가 강조될 때면 으례 남을 음해·모함하는 사회악이 만연되곤 했다. 근자에도 정부가 서정쇄신 노력을 강화하면서 당국에 갖가지 투서가 답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수사의 단서가 될만한 것도 전혀 없지는 않으나 남을 모함하는 허무맹랑한 내용이 대부분이라는 얘기다.
연전에 서울시경이 2년반 동안 접수한 각종 진정서·투서·탄원서 9천9백10건 중 36%를 점하는 3천2백26건이 무고로 밝혀진 적이 있다.
그중 대부분의 무고는 무기명 투서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게 이 사회에 횡행해온 무기명 투서란 무책임하고 유해한 무고행위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서정쇄신이 강력히 실시된지 1년3개월 동안 대부분의 선량한 공무원들이 무책임하고 악의에 찬 투서행위로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까는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공무원 사회에서 부패와 부조리를 제거하는 일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선량한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마음놓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일이다. 그렇지 못할 때 그 피해는 결국 국가와 국민들에게 미친다. 부패 공무원 처벌 못지 않게 선량한 공무원을 보호하고 포상하여 사기를 높이는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지적한 대통령의 말은 지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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