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대까지 접수한 군대 문화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몇 년 전의 일이다. 서울에 있는 한 사립여대 음대에 다니는 지인의 딸이 연주회를 한다고 해서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연주회장에 일찌감치 도착해서 객석 앞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앞에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 열댓 명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그 학생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뒤로 돌리더니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큰소리로 “안녕하세요”를 외치며 모두가 90도 각도로 머리를 숙였다. 총장이라도 왔나 해서 뒤를 돌아보니 인사를 받는 사람은 비슷한 또래의 여대생들이었다. 물어보니 같은 과 선배라고 했다.

같은 과에 다니는 선후배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당시 그 광경은 내게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열댓 명의 학생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큰소리로 인사하는 것도 그렇고, 90도 각도로 고개를 숙이는 것도 그랬다. 대학생이 아니라 마치 조직폭력배를 보는 것 같았다. 나중에 그 학교에 다니는 지인의 딸로부터 들은 얘기는 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선배들의 횡포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도에서 선배와 마주치면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해야 하는데, 만약 선배가 여러 명이면 그 숫자만큼 인사를 해야 한단다. 세 명이면 “안녕하세요”를 세 번, 네 명이면 “안녕하세요”를 네 번 외쳐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굴욕적인가. 하지만 만약 안 그러면 선배들에게 불려가 ‘건방지다’는 등 온갖 욕설을 듣고, 학교 생활이 불편할 정도로 따돌림을 받는다고 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던 지인의 딸은 결국 대학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요즘 대학가에 만연한 군대 문화가 심심치 않게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다.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선배가 후배를 몽둥이로 때리거나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토끼 걸음을 걷게 하고, 땅바닥에 구르게 하는 등 가혹행위를 일삼는다. 후배들은 머리 모양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옷도 마음대로 입을 수 없다. 선배들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해야 하고, 심부름을 시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 이쯤 되면 대학생활이 아니라 거의 노예생활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에 나라의 앞날을 이끌어갈 창의적인 인재를 키워야 할 대학에서 벌이지고 있는 일이다.

도대체 어느 누가 이들에게 마음껏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주었단 말인가? 어느 누가 이들에게 한 개인의 인권을 마음대로 유린할 권리를 주었단 말인가? 대학 새내기들이 이토록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고 있을 때, 도대체 교수와 총장은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교육 당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일이 이 지경까지 된 것을 나는 전적으로 어른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교수든 학생이든 엄격하게 책임을 묻고 철저하게 징계했다면 이런 문제가 되풀이해서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불거지면 대학은 반성보다 변명에 급급하다. 학교의 명예 운운하며 문제를 덮기에 바쁘다.

그런데 가혹행위를 한 학생이나 이를 방임한 교수들이 하는 변명을 들어보면 더 기가 찬다. 학생들은 군기를 잡기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고, 교수는 생활 지도나 예절 교육 차원에서 이를 어느 정도 허용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묻고 싶다. 성인인 대학생에게 왜 생활 지도와 예절 교육이 필요한지. 대학에서 왜 군기를 잡아야 하는지. 그렇게 후배들을 괴롭혀서 마침내 군기가 꽉 잡힌 모습을 보면 마음이 ‘심히’ 흡족한지.

대학생 정도의 나이면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를 가진 성인이라 할 수 있다. 성인은 훈육의 대상이 아니다. 선배에게 인사를 하든 안 하든, 남들이 보기에 민망한 옷을 입든 얌전한 옷을 입든, 파격적인 색깔로 머리를 물들이든 아니든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과 선택의 문제다. 그렇게 해서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그것도 전적으로 개인이 감내해야 할 문제이다. 선배나 교수가 나서서 강제로 이래라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대학가에서 자행되고 있는 가혹행위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권 의식의 부재와 맞물려 있다. 이 문제는 얼마 전에 크게 이슈가 된 ‘황제 노역’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주목을 못 받고 있다. 문제의 학교 중에는 미래의 교원을 양성하는 대학도 있다고 한다. 후배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이들이 교사가 되면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그 가혹한 폭력의 대물림을 교육 당국은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지. 미래의 잠재적인 피해자를 둔 학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묻고 싶다.

진회숙 음악칼럼니스트 hwesook7@naver.com



진회숙 서울시향 월간지 SPO의 편집장을 지냈다.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공부하기 등에서 클래식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클래식 오딧세이』 등이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