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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노역'의 40년 생존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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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조강수
사회부문 차장

그냥 놀라워서 혀만 끌끌 찼다. 1970년 11월 24일 선고된 환형유치(換刑留置) 관련 대법원 판결을 접하고서였다. 대일수출어선의 선원 최모씨 등 2명이 일본에서 고급 시계 700개 등 7500여만원어치를 밀수입하다 관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1, 2심은 두 피고인에게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벌금 1100만원씩을 선고하면서 “벌금을 내지 않으면 1일당 금 10만원으로 환산한 기간 노역장에 유치한다”고 판결했다. 그러자 검찰이 상고했다. “하루 수입이 수백원에 불과한 선원에 대해 1100만원의 벌금을 불과 110일의 노역장 유치로 때워 버리게 한 것은 재판부의 재량권 한계를 벗어나 환형유치제도의 목적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상고심을 맡은 대법원 형사부는 간단히 기각했다. “원심 판결은 법규의 어느 부분도 위배된 바 없다”는 거였다.

 40년 뒤인 2010년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에 대해 내려진 ‘황제 노역’ 판결과 전개 과정, 선고 결과가 흡사하다. 1심은 그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508억원을 선고했다. 2심에선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 벌금 254억원으로 감형됐다. 벌금을 내지 않으면 하루 5억원씩 49일만 형을 살면 탕감되도록 했다. 관세법을 위반한 밀수범이 조세를 포탈한 중견건설사 오너로, 1100만원 벌금이 254억원 벌금으로 진화(?)한 것을 제외한다면 두 판결은 국민 대다수가 갈망하는 ‘정의’와 ‘형평성’을 저버렸다는 점에서도 대동소이했다.

 특히 ‘황제 노역’ 사태는 향판인 장병우 전 광주지법원장의 ‘일당 5억원’ 판결과 대법원 확정 판결, 같은 지역 출신 검사의 벌금 선고유예 구형, 벌금 납부 대신 노역장행을 고른 허 전 회장 선택의 합작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환형유치를 둘러싸고 법원과 검찰, 국민이 느끼는 문제의식의 큰 간극은 여전하다. 하루 5만~10만원대 환형유치 선고를 받고도 돈이 없어 노역장 유치를 택하는 서민 범죄자가 매년 3만여 명(2011년 3만4361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과 하루 수천만~수억원씩 인정받는 부유층 인사들의 형평성 문제가 유사한 판결이 나올 때마다 논란이 됐었다. 그럼에도 40년 넘도록 고치지 못한 데는 법원 책임도 크다. 장 전 법원장 개인이나 향판의 문제로만 몰아가는 듯한 법원의 행태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재량권 행사의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지 못한 것도 이번 사태의 원인일 것”이라며 “법관들이 판결의 예측가능성이라는 명분으로 기존의 틀을 유지하려는 이른바 ‘관성의 법칙’을 깨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 전 법원장은 3일 퇴임식에서 늦게나마 “국민의 생각과 눈높이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며 후회했다고 한다. 또 “과거에 재판하면서 어떤 증거나 자료에만 사로잡힌 나머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절실한 호소를 외면한 일이 있어 업보를 받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고도 했다. 법규라는 나무에만 매달리다 보면 숲을 보지 못할 수 있다는 고백이다.

조강수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