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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 터치] 오스카의 절묘한 정치적 줄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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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열린 제75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잘 짜인 드라마, 그것도 매우 정교한 정치극이라 할 만했다.

약간 허세를 부리는 듯한 말투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을 호되게 비판한 '볼링 포 컬럼바인'의 마이클 무어 감독은 아카데미상의 도량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고발한 '피아니스트'의 선전(善戰)은 마치 미국의 양식을 보여주려는 연출 같았다.

'피아니스트'는 비록 작품상을 뮤지컬 영화 '시카고'에 양보했으나 감독.남우 주연.각색상 등 노른자위 부문에서 3개의 트로피를 안았다. 비슷한 주제의 '쉰들러 리스트'와 '인생은 아름다워'가 이미 아카데미상의 영예를 맛본 터라 올 '피아니스트'에 쏟아진 각광은 더욱 의외였다.

어린이 성추행 혐의로 프랑스로 달아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작품에 영광이 돌아갔다는 점도 겹쳐 '피아니스트'의 손을 높이 들어준 할리우드의 판단 근거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사실 '피아니스트'는 각종 수상 예측에서 '시카고''갱스 오브 뉴욕'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이라크전에 대한 국제 여론의 비판을 휴머니즘 옹호란 방패로 가리려는 뜻이 개입됐던 건 아닌지….

미국 사회의 뿌리를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폭력적 구조에서 찾은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갱스 오브 뉴욕'이 철저하게 외면당한 것과 비교하면 그런 추측도 해 볼 법하다. 자기 내부의 치부는 감추고, 외부의 비인간적 행위에는 분개하는 미국인의 애국적 심성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오스카상이 정치적 잣대에 따라 결정됐다고 할 수는 없다. 소수의 심사위원단이 아닌 회원 6천여명의 비밀 투표로 결정되는 시상 결과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일종의 집단 심리가 반영될 여지는 충분하다. 미국의 꿈과 이상을 대변하는 할리우드, 그 이념이 농축된 아카데미상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이라크전이란 엄청난 변수가 있으니….

최근 뉴욕 타임스에는 '시카고'와 부시 대통령을 연결짓는 칼럼이 실렸다. '시카고'에서 남편을 살해한 록시(르네 젤웨거)가 변호사와 공모해 기자들 앞에서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장면과 부시 대통령이 평화와 신의 이름으로 이라크전을 시작한다는 기자회견 장면이 꽤나 흡사하다는 지적이었다.

영화평론가 프랭크 리치는 '시카고' DVD판에 부시의 회견 장면을 함께 수록하자고 가시 돋친 제안도 했다. 영화, 나아가 영화제도 정치 무풍지대는 아닌 모양이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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