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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카메라 20대에 맞서 … 저항 수단은 꽃 한송이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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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스튜디오 앞에 선 아이웨이웨이. [베이징=권근영 기자], [중앙포토]
아이폰5에는 꽃분홍색 반창고를 붙였다. ‘행동하지 않으면, 위험은 더욱 거세진다’라고 영어로 씌어 있다. 미술관 전시 때 제작한 거라 했다. [베이징=권근영 기자], [중앙포토]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저항의 아이콘, 아이웨이웨이(艾未未·57)다. 2011년 4월 3일 구금된 후 3년이 넘은 지금까지 해외 출국 금지 상태다. 중국 정부는 탈세 혐의를 내세웠지만, 세상에선 그가 정부 비판의 수위를 높인 탓이라고들 했다. 그를 베이징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이 저명한 반체제 예술가는 “내가 변하면 사람들이 바뀌고, 사회가 바뀐다. 예술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798’에 이어 중국 베이징에서 두 번째로 큰 예술구, 지난 13일 차오창디(草<573A>地)는 고즈넉했다. 인적 드문 골목길에 ‘258 FAKE’라는 문패를 단 에메랄드빛 대문이 눈에 띄었다. 길가에 세워둔 자전거 바구니 안엔 싱싱한 꽃이 한 다발, 한가로운 아침 풍경이었다. 그러나 문 앞에 나와 있던 사내는 “주변에 폐쇄회로 TV만 20여 대 이상 설치돼 있다. 여기는 베이징 시내에서 천안문 광장 다음으로 감시 카메라가 많은 곳일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웨이웨이였다.

매일 아침 스튜디오 앞에 세워둔 자전거에 생화 한 다발을 가져다 놓는다. 자유를 요구하는 꽃시위다. 땅에 떨어진 꽃을 머리에, 스튜디오 간판에 꽂았다. [베이징=권근영 기자], [중앙포토]

 그에겐 생화(生花)조차 저항의 도구였다. 2011년 4월 3일 서우두 공항에서 연행돼 81일간 구금됐다. 이때 여권이 몰수돼 3년째 국외 여행이 금지됐다. "여행의 자유를 돌려달라며 100일 남짓 ‘꽃시위’를 이어가고 있다”며 "내 저항 수단은 꽃”이라고 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안쪽 담벼락을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네온사인이 있었다. ‘FUCK’, 그의 작업실 이름인 ‘페이크 스튜디오’와 중국어 발음이 유사하다. ‘페이크(fake·가짜)’라는 이름과 대조적으로 그가 직면하는 도전은 리얼하다.

 그는 시대와 불화하는 악동으로 살아왔다. 아내인 예술가 루칭이 1993년 천안문 광장에서 치마를 걷어올리고 있는 불경한 사진으로 시작한 ‘원근법 연구’ 연작이 그랬다. 스위스 건축가 그룹 헤르조그&드뫼론과 함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설계에 참여했지만, 당국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2009년 쓰촨성 대지진 때는 무너진 학교 건물들의 부실공사 의혹을 조사하다가 구타당해 뇌출혈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를 만났을 때 중국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兩會)가 한창이었다. 그의 ‘정치적 쓴소리’는 계속됐다. “지금 중국은 경제적으로 굉장히 부흥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엄청나게 낙후돼 있다. 민족 문제, 인권 문제 등이 해결되고 독립된 사법 체계가 확립되지 않는다면, 이 나라엔 희망이 없다”고 주장했다.

2012년 가을, 그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패러디해 수갑을 흔들며 말춤을 추는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베이징=권근영 기자], [중앙포토]

 - 6년 만이다. 당신을 처음 봤던 그때만 해도 이렇게 만나기 어려운 인물이 될 줄 몰랐다.

 “나도 그렇다. 정말 이상한 일 아닌가.”

 2008년 5월 그는 서울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11년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에는 건축가 승효상 씨와 공동감독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여권 몰수로 참석할 수 없었다. 그가 탈세 혐의로 구금돼 거액의 추징금을 물게 됐을 때 세계 미술계에서는 아이웨이웨이 석방 운동, 추징금 모금 운동이 벌어졌다. 미술계 밖에서도 이름을 알렸고, 급기야 노벨평화상 후보로까지 거론된다. 탄압으로 오히려 유명해졌다.

 - 당신 예술의 키워드는 ‘반체제’인 셈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가장 중요한 건 권리를 선택하는 자유이며, 이것은 생존의 기본 조건이다. 개인이 각성해 사회를 이해하는 일, 즉 내 예술은 책임을 승인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하나뿐인 생명이 어떻게 본연의 자유를 누릴지, 어떻게 다른 이에게 긍정적 도움이 될지를 고민한다.”

 창문으로 오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ㄷ’자형의 벽돌 건물은 그가 1999년 차오창디 예술구로 이사하면서 직접 설계해 지은 첫 건축 작업이다. 이 집에선 고양이도 자유롭다. 고양이 두 마리가 주인이 인터뷰 중인 탁자 위를 타고 넘었다. 스튜디오에선 30여 마리의 길고양이를 거두고 있다. 이 반체제 작가는 인터뷰 중 끊임없이 아이폰5로 사진을 찍고 이를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 무엇을 위한 저항인가.

 “나 자신이 변하면 그걸 통해 주위 사람들을 바꿀 수 있고, 그게 퍼져나가면 이 사회가 바뀔 거다. 다섯 살 아들이 10년 후면 15세다. 그때는 베이징의 공기가 지금보다 깨끗하면 좋겠고, 생각을 다르게 한다는 이유로 이런 문제를 겪지 않는 시대이길 바란다.“

 - 간단히 답해보자. 당신에게 예술이란.

 “예술은 우주에 떠다니는 먼지의 일부일 뿐이다. 나를 예술가로 만든 힘은 분열이다. 자아의, 불확정한 분열이다. 저항? 그건 태생적인 거다. 개별 개체이던 정자와 난자가 만났다 합쳐졌다 분열되던 때부터 시작된 거다. 그 같은 저항으로 한 사람이 태어나고, 태어난 뒤에도 그는 계속 시스템에 저항하면서 살아가는 것 아니겠나.”

 - 이미 여러 차례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에 꼽혔다. 영국의 미술전문지 ‘아트리뷰’만 해도 2011년 당신을 1위로, 이듬해엔 3위, 지난해엔 9위로 꼽았다. 어떤 예술가로 남고 싶은가.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권리를 주장하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인간 관계를 바라보는 예술가가 중국에 있었다, 이런 인간관계의 가능성은 예술을 통한 것이었고, 그 예술은 모든 이의 생존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렇게 기억되고 싶다.”

 두 시간 남짓한 대화를 마칠 때쯤 10여 명의 외국인이 들어왔다. 미국 예일대에서 그를 보러 온 학생들이라 했다. 기자가 떠나고 이틀 뒤,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 기자가 찾아왔다. 아이웨이웨이는 그와의 인터뷰에서 “시진핑 주석이 독일 순방 때 베를린서 열리는 내 대규모 전시를 보러 갈 시간을 내면 좋겠다. 같은 배경을 가진 동년배 남성이 어떻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권근영 기자

◆아이웨이웨이(艾未未)=1957년생. 중국 서쪽의 고비사막 끝에서 자랐다. 베이징 영화학교를 거쳐 뉴욕으로 이주,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수학했다. 미술가·시인·건축가·큐레이터·출판인·도시계획가·수집가·블로거 등 전방위로 활동하며 중국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2007년 카셀 도쿠멘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설계에 참여했다. 2010년 테이트 모던 터바인홀에서 대규모 전시를 열었고, 2011년 광주비엔날레 공동 총감독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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