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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노역' 향판 사표 … 대법, 수리 않고 감찰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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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황제노역’ 판결로 논란이 된 장병우(60) 광주지방법원장에 대해 대법원이 사표 수리를 보류하고 감찰 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 측과의 아파트 거래 등 제기된 의혹들을 먼저 규명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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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법원장은 지난 29일 “본인의 불찰로 인한 국민 여러분의 질책을 겸허히 수용하겠다”며 사표를 제출했다. 억울한 심경도 내비쳤다. 그는 “과거 확정판결에 대해 종합적 분석 없이 한 단면만 부각시키고 (사태가) 지역 법조계에 대한 비난으로 확대돼 아쉽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색안경을 끼고 이상하게 바라보는 상황에서 더 이상 법관의 직을 수행하기 어렵게 됐다”고도 했다.

 대법원의 감찰 착수는 장 법원장이 ‘일당 5억원’ 판결의 수혜자인 허 전 회장과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았느냐는 의혹이 계기가 됐다.

 장 법원장은 2007년 5월 대주건설이 분양한 광주시 동구의 188㎡(60평) 규모 대주피오레 아파트를 사 입주했다. 입주 5개월 후 기존에 살았던 K아파트를 대주그룹 계열사인 HH개발에 팔았다. 장 법원장은 “정당한 거래였다”는 입장이다.

향판 문제점을 지적한 본지 3월 25일자 1면.

 30일 중앙일보가 2007~2008년 관보를 확인해보니 대주피오레 아파트 구입 당시 장 법원장은 신한·광주 은행에서 총 2억7155만원을 대출받았다. 이듬해에는 기존에 보유하던 2억400만원짜리 K아파트를 2억6000만원에 매각한 돈 등으로 은행 대출금을 전부 갚았다고 신고했다. 그는 “은행 대출과 동생에게 빌린 돈으로 대주피오레 아파트를 4억5000만원에 구입했고 K아파트는 시세보다 싼 2억6000만원에 팔았다”고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HH개발이 기존 주택을 산 과정과 배경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검찰 관계자는 “당시 부동산 거래가 안 돼 1가구2주택 상태에서 제때 못 팔았다면 양도소득세 50%를 물어야 했을 것”이라며 “만약 아파트가 필요 없는 HH개발이 대신 사준 것이라면 수천 만원 규모의 양도세만큼 혜택을 공여한 것으로 볼 소지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HH개발은 이 아파트를 4년이나 보유하다 대법원이 허 전 회장에 대한 확정판결을 내리기 직전인 2011년 12월 백모(38)씨에게 판 것으로 돼 있다. 또 당시 여윳돈이 없어 은행 대출을 받아 새 집을 장만한 장 법원장에게 금융기관 채무(2억6000만원)의 대출이자만큼 이익도 준 셈이다.

 장 법원장이 부동산에 매물로 내놓은 뒤 8개월이 지나서야 HH개발이 산 것으로 드러나면서 의혹이 커지고 있다. 장 법원장으로부터 60평대 아파트 매매를 의뢰받았던 부동산 거래업체 대표 A씨는 이날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2007년 2월 장 법원장이 직접 전화해 ‘K아파트를 3억원에 팔아달라’고 했고 잘 안 팔리자 5월 말 찾아와 ‘이달 이사를 간다. 매매 가격을 3000만원 내려 2억7000만원에 팔아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 신분을 밝혀 판사임을 알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A씨는 12년 된 장 법원장의 아파트와 인근에 새로 지은 아파트 거래 가격이 비슷해 매매를 성사시키지 못했다. A씨는 “그해 10월께 장 법원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 ‘지인이 소개를 해 거래가 성사됐다’고 말했다”며 “거래가 이뤄진 곳이 HH건설인지 모르고 있다가 같은 달 건설사가 해당 아파트를 전세로 내놓으면서 알게 됐다”고 밝혔다. 해당 아파트 매매 시점은 대주그룹이 탈세 의혹이 불거져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린다. 한지형 광주지법 공보판사는 “장 법원장이 ‘(매매를 위해) 여기저기 시세에 맞게 말을 해놨고, 거래 상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팔았다’고 전해왔다”고 말했다.

 ◆“지법 부장판사도 재산공개를”=장 법원장의 사의 표명으로 2004년 도입된 지역법관(향판·鄕判) 제도 개선안 논의도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아예 폐지하거나 지방법원부장·고등법원부장·법원장으로 보임할 때 일정 기간 지역 근무를 의무화하는 개선안 등을 논의했다. 하지만 전면 폐지는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많다. 서울지역에 임관하는 법관은 고등부장이 되기까지 약 20년 중에서 대략 5~7년은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근무한다. 지역법관이 사라지면 이들의 지방 근무가 10년 이상으로 늘어나게 된다. 법관인사제도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역법관제를 계속 유지한다면 현재 고법 부장(차관급) 이상만 하게 돼 있는 재산공개를 실질적으로 1급 예우를 받는 지법 부장 이상으로 확대해 비위 소지를 줄이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민제·권철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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