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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도내의 유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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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계룡산 신도안이 유사종교의「메카」로 오늘의 명성(?)을 얻은 것은 정감록 비결과 풍수지리설 때문.
마을원로 김종팔씨(64·논산군 금마면 부남리3구)는 산의 형세가 『용이 여의주를 갖고 놀고 닭이 알을 품은 형상』이라며 입에 물었던 장죽을 빼들고 뒷산 연봉들을 가리켰다.
예부터 오악의 하나로 알려져 온 중악 계룡산은 지기지령이 센 곳으로 알려져 왔다는 것.
계룡산의 재자봉·고위봉·장군봉·마용봉·국사봉·신털봉이 모두 마을을 향해 둘러싸고 있으나 오직 동북쪽 봉우리 한 개만이 반대쪽을 향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외고집통 봉우리에 「역적봉」이란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다.
신도안은 태조 이성계가 한 때 왕도로 내정했다가 그만둔 곳이라고도 전해내려 온다.
지금도 부남리 장터 대전행시외「버스」가 서는 청루장 뒤쪽 밭터에는 이 태조가 궁궐의 주춧돌로 쓰기 위해 금강산에서 옮겨다 놓았다는 크고 작은 집채만한 주춧돌이 2백여개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청태가 두껍게 낀 바위들이지만 칼로 자른 듯 네모반듯한 모양과 정을 맞은 자국이 역력한 것을 볼 때 인공적으로 캐다 놓은 것이 틀림없는 듯.
이성계가 궁궐공사를 한창 벌이고 있던 어느 날 백발이 성성한 떡장수할머니가 나타났다고 한다. 할머니는『이 곳은 정씨네 땅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면 천벌을 받는다』고 말한 뒤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 떡장수를 신의 화신으로 알아차린 이 태조는 그 자리에서 궁궐공사를 중단시켰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그 뒤 이 태조는 자신을 지도해준 신에게 감사를 드리기 위해 계룡산에 있던 백제말기의 절을 중수, 신은사라 불렀다. 이 절이 지금의 신원사.
또 정감록에는 계룡산이 말세의 삼재지변과 병화를 면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라고 기록돼 있다.
정감록은 정감과 이필이 서로 묻고 대답한 비결을 비롯, 토정비결·도선 비결·진학비결 등을 한데 묶은 것. 이 가운데 십승 지지 사상은 난리가 일어나도 안전할 수가 있는 피난처에 대한 사상. 황무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 맨 먼저 정착한 사람들은 이조중엽 정력을 연구하는 유림들이었다.
이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관상·사주 등을 보기 시작하면서 유사종교의 싹이 텄다.
그러나 신도안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불과 50∼60년 전.
1916년 박중빈 대종사가 이곳에 불교 한 종파의 법당을 지은 것이 종교 촌의 시초가 됐다.
그 뒤 1923년 동학교계의 김연국씨가 시천교 본부를 옮겨왔다. 시천교는 동학계를 떠나 상제교로 바뀌고 이는 다시 천진교로 분파, 거미줄 같은 종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천진교 창시자 김인국의 무덤은 지금 석계2리 마을 뒷산 소나무 숲 속에 남아 있다.
1918년 한해에만도 정감록의 비결을 믿는 자들이 8백여명이나 신도안으로 이주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정씨가 도읍을 하면 방·우양성이 정승이 된다』 그 때는 양반들은 쇠하고 백성이 출세한다』는 등 자기 나름의 말세주의와 신 개벽사상을 주창했다.
이렇게 몰려든 자칭도사들은 산 이름·동네이름까지에도 저 나름의 사상과 관련된 이름을 붙였다.
유·불·선 3교가 합한 곳이 신도내라 하며 동쪽 끝을 유림동, 남쪽마을은 남선리, 서쪽골은 불암리라 이름 지었다. 신도안 어귀는 정장리로 불러 잡귀가 못 들어 오게 했다.
그러나 이들의 예언이나 약속이 실현되지 않자 많은 선도들이 가산만 탕진한 채 이곳을 등지게 됐다.
이제 이 지방에는 『신도안을 건드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앞날이 풀리지 않고 재앙을 만난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계룡산=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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