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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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대보름은 어딘지 서민들의 명절 같다. 흙 냄새가 풀풀 나는 부럼들을 우둑우둑 깨어 먹는 것하며 저마다 명절이 주는 마음의 부담 같은 것도 없다. 푸줏간보다는 장바닥이 더 붐비는 정경도 한결 서민적이다.
오곡밥이나 나물과 같은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찰 수수·차조·콩·취나물·도라지·고사리 등은 독특한 맛보다는 구수한 맛으로 하여 사뭇 인정이 있는 음식들이다. 누린내 나는 호사스러운 상차림에 비해 이들은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포근한 분위기를 풍겨 주는 것이다. 한국인의 심성은 워낙 이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대보름을 말하자면 1년에 열두번 있는 만월의 첫번째다. 「캘린더」가 따로 없이 대 음력으로 하늘이나 쳐다보고 지내던 옛사람들은 정작 이 첫 만월을 설날로 지낸 기록도 없지 않다. 그럼직도 하다. 겨울밤, 창창한 하늘에 대보름 첫번째 달이 떠오르는 것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뿌듯했을 것 같다.
달맞이·다리 밟기·줄다리기·횃불싸움·달집태우기·놋다리밟기·차전놀이·나무쇠싸움·고싸움놀이·농기세배들이…이름만 듣고는 알듯 모를 듯한 이 민속놀이들은 모두 대보름의 행사들이다. 옛 사람들은 논바닥에서, 혹은 앞마당에서 이런 놀이들을 즐기며 흥을 돋웠었다.
정초의 나들이는 애친경장 (웃어른을 섬기고, 어버이를 모시는)에서 비롯된, 이를테면 혈연 관계에 더 마음을 쓰는 행사다. 그러나 대보름은 이웃과 동네와의 화목을 더욱 존중하는 행사들이 대부분이다.
그 가운데서도 볼 만한 것은 농악이 있다. 동제를 위해 이 농악대들은 꽹과리를 울려대면서 온 마을을 술렁거리게 만든 다음 국태민안을 축원하며 다가오는 신춘의 농삿일에도 기운을 돋우는 것이다. 요즘은 그 장쾌한 우리의 토속 예술도 울긋불긋 「나일론」 자락이나 펄럭이며 낯선 관광객들을 위한 눈요기로 변하고 말았지만, 옛 풍속에 대한 향수는 그럴수록 애틋해지기만 한다.
요즘의 농촌 청년들에겐 오히려 농악보다는 유행가나 「재즈」가 더 친숙할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 더 좋고 그르고는 접어두고라도, 다만 전통의 단절이랄까, 미풍 양속의 전락이랄까…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적막감을 주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명절들을 지낼 때마다 이런 감회는 깊어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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