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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금감원 상고시대, 봄날은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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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금융권 ‘상고(商高)시대’가 저물고 있다. 상업고교 출신들이 은행 등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자(CEO)와 임원직을 대거 차지했던 것도 이제는 옛이야기가 됐다. 그나마 마지막 전성기를 누리는 곳이 금융회사를 감독하는 금융감독원이다.

 현재 금감원 1급 이상 국장급 간부 가운데 상고 출신은 11명이다. 금감원의 임원과 국장급 이상 간부 69명 중 16%를 차지한다. 역대 최다라는 게 금감원의 설명이다. 임원 중에선 중앙상고를 나온 박세춘 부원장보가 유일하지만 주요 국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 많다. 기업구조조정을 담당하는 김진수 기업금융개선국 선임국장은 덕수상고, 카드사 정보 유출 사건 이후 소방수로 투입된 조성목 여신전문검사실장은 강경상고(현 강상고)를 나왔다. 카드사 감독업무를 맡아 2차 피해 예방 대책을 내놓은 김영기 상호여전감독국장(안동상고), 금융사기 예방 대책을 마련한 양현근 서민금융지원국 선임국장(광주상고), 금융권 IT·보안 감독 업무를 맡은 송현 IT감독국장(목포상고)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1958~63년생으로 모두 77~81년 사이 한국은행에 입행했다. 한은은 88년까지 고졸 출신의 초급 직원을 채용했다. 당시엔 집안 형편이 어려운 우수한 인재들이 상고를 가던 때다. 덕수·선린·부산·대구·광주 등 전국 명문상고에서도 1등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한은이었다. 이들은 한은 산하 은행감독원이 99년 증권감독원·보험감독원·신용관리기금과 함께 금감원으로 통합되면서 옮겨왔다. 금감원이 뒤늦게 상고 전성시대를 열고 있는 것은 다른 금융회사보다 상대적으로 오래 다닐 수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통합 금감원 출범 이후엔 고졸 출신을 뽑지 않았다. 현재 금감원은 전체 1800명 직원 가운데 20% 이상을 변호사(89명), 회계사(330명), 세무사(56명)와 같은 외부 전문직이 차지하고 있다. 신입 공채 직원들도 주요 대학 출신이 많다. 금감원이 고졸 출신을 뽑기 시작한 것은 2012년부터다. 매년 5명씩 채용한다. 김영기 국장은 “상고 출신의 명맥이 끊겨 안타깝지만 예전과 교육환경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최근 고졸 출신 채용을 늘리고 있는 만큼 그들이 검사 경험을 쌓아가면 대졸자 못지않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반 금융권은 신한은행 정도를 제외하면 명맥만 잇는 수준이다. 신한금융지주는 2009년 라응찬 지주 회장(선린상고), 신상훈 사장(군산상고), 이백순 신한은행장(덕수상고) 등 1~3인자가 모두 상고 출신이었다. 당시엔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부산상고), 김동수 수출입은행장(덕수상고)까지 포진한 ‘상고 천하’였다. 신한은행은 지금도 부행장 6명이 상고 출신이다. 영업력을 중시하는 문화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다른 시중은행들은 1~2명 선이다. 고졸 출신을 뽑지 않게 되면서 상고 출신 직원이 줄었기 때문이다.

 금융권 고졸 채용은 이명박 정권에서 붐이 일었다가 지금은 주춤하고 있다. 현 정부가 경력단절 여성 채용과 시간제 일자리를 내세우면서 방점이 옮겨간 탓이다. 최근 논란이 일자 대형 시중은행들을 중심으로 고졸 채용을 다시 확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고졸 출신으로 취업에 성공해도 주로 단순 업무를 맡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교육 구조가 획기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고졸 출신을 얼마나 배려해 줄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당장은 고졸 출신을 뽑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그들이 능력을 잘 발휘하도록 입사 후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상고를 나온 금감원 간부 11명 모두 직장을 다니며 대학에 갔다. 2명을 빼곤 대학원까지 나왔다. 고졸 출신이 취업의 문턱을 넘어 조직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자기 계발이 필수적이란 얘기다.

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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