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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캘커타」에서 제1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김찬삼 교수(지리학·수도여사대)의 세계여행기 『세계의 나그네』를 오늘부터 연재합니다. 매주 2회에 걸쳐 싣게될 이번 여행기는 동남「아시아」를 거쳐 서남「아시아」·「아프리카」 그리고 「카리브」해 등을 섭렵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중동의 술렁거리는 석유지대와 「아프리카」 「앙골라」 등지의 기행은 깊은 관심을 자아내게 합니다. <편집자 주>
이번 여행은 벌써 다섯 번째가 되지만 마음이 설레긴 언제나 마찬가지다. 미지의 나라·미지의 여로는 마치 낮선 여인처럼 조심스럽고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것이다.
이번 여행도 역시 쉽사리 가보기 힘든 처녀지를 밟으려고 계획을 세워보았다. 이것이 늘 나를 격려하고 편달해 주시는 많은 독자들의 기대에 보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느 철학자의 말마따나 「노예도덕」이란 말처럼 나쁜 뜻이 아니라 좋은 뜻의 「노예여행가」가 되는 셈이다.

<다시「미지의 땅」을 찾아>
이번의 여장도 그전과 다름없이 30여kg이나 되는 무거운 「룩색」과 4대의 「카메라」 와 1대의 「무비·카메라」뿐이다. 다만 색다른 것이 있다면 내 조국의 흙 한줌을 고이 봉지에 싸서 가지고 가는 것이다. 이것은 고국이 그리울 때 이 흙 냄새를 맡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특히 지난 여행 때는 낯선 나라에 묻혀 있는 우리동포의 묘지를 발견하고 몹시 감회가 깊었다. 이번 여행에서 만일 동포의 무덤을 또 찾게되면 그 위에 뿌려주기 위해서 흙을 싸 가지고 떠난 것이다.
12월23일 아침 김포공항을 떠나 대만의 대북에 잠시 머무른 뒤 오후「홍콩」공항에 내렸다. 여기서 필요한 「필름」 2백80개를 마련하고는 다음날 오후 첫 기착지인 인도의 「캘커타」로 가기 위해 여객기에 올랐다.
월남상공을 직행하면 빠르겠지만 동지나해의 해상을 따라 「사이공」강을 멀리 바라보면서 기수를 태국의 「방콕」으로 돌렸다. 어둠 속에 보이는 「사이공」강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지난 월남전 때의 온갖 비극들이 되살아날 뿐 아니라 내가 첫 번째 세계여행 때엔 선편으로 들렀건만 다시는 오지 못할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맨발의 인도「스튜어디스」>
「방콕」에 잠깐 머무른 뒤 다시 「캘거타」로 향했는데 「에어·인디아」의 실내장식에는 특이한 「무드」가 있었다. 벽지에는 코끼리, 「시바」신의 삼면상, 「무갈」왕조 마상, 성의 전당인 「카줄라호」의 애무하는 남녀의 조상, 가마를 탄 여인, 그리고 「아라베스크」한 「이슬람」풍들로 뒤덮여 있었다. 게다가 이국정서가 넘치게도 살갗이 가무잡잡하고 눈망울이 크며 키가 훤칠한 인도여성인 「스튜어디스」가 좁은 통바지에다 맨발로 「샌들」을 신고 「모나·리자」의 신비로운 미소보다 더 오묘한 힌두교의 종교적인 법열의 미소를 머금고 여객들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길에 즐비한 굶주린 인파>
저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가 있는 산맥을 지나 「버마」의 「랭군」을 오른쪽으로 보면서 북서쪽으로 향하다가 「갠지즈」강서 삼각주를 지나 하오 10시나 되어 「캘커타」공항에 내렸다. 두 번째로 오는 인도인데 이번엔 입국절차가 너무나도 쉬웠다.
「비자」가 없었으나 우선 4주일간 머무를 수 있는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그전엔 무척이나 까다로웠는데 이번엔 여행자에 대해서는 세관조사마저 없었다. 이 나라의 정치적·경제적인 발전에서 오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캘커타」도심지로 들어가려고 차를 탔으나 공교롭게도 짙은 안개가 자욱히 끼어서 제대로 달리지 못했다. 번화가로 들어서니 희미한 가로등이 안개 속에 감춰져서 성인의 섬광과도 같이 보이는가 하면, 길가에는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무슨 학살 장면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두 번째 여행을 통해 이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린 가로족이나 걸인들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참 들여다보아도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영양실조로 움직일 기력들이 없어서인지 누워들 있으니 흡사 죽은 사람과도 같았다. 이런 모습을 보아서는 12년 전에 왔을 때보다 사회정책이 별로 달라진 데가 없는 것 같았다.
지하자원은 풍부하지만 아직도 민생고는 해결되지 못하는 것일까. 문득 로망롤랑이 『인도연구』에서 『존재하는 유일의 신, 내가 신앙하는 유일의 신, 나의 신이란 바로 비참한 사람들이며, 모든 민족의 가난한 사람들이다』라고 한 귀절이 생각난다.
어느 민족보다도 처참한 전쟁을 겪은 우리의 눈엔 인도의 사회적인 비참이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가 오랜만에 이 나라에 다시 찾으면서 느끼는 첫 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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